3초 만에 제주도 가는 법? 나를 여행지로 데려다주는 향수 6 (feat.내돈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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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언스플래쉬

    프루스트식 순간이란 말이 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용어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이처럼 향기에 의해 특정 순간이나 기억을 연상하게 하는 작용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우리가 특정 냄새를 맡는 순간, 해당 향이 가진 화학물질의 정보가 후각신경세포에서 전기신호로 바뀌어 우리의 뇌에서 정보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신호가 뇌로 도달하면, 뇌는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향을 받아들이고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본다.

    이처럼 향을 맡는다는 것은 결코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향수는 순식간에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놓을 수도 있으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가능케 한다. 향은 이토록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향수는 나에게 추억, 뇌과학과 마케팅, 여행과 문학 모든 것이 함께하는 ‘향기의 미학’ 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인 요즘, 한 순간에 훌쩍 나를 여행지로 보내주는 몇 가지 향수를 소개하려 한다. 오해는 마시라. 전부 ‘내돈내산’, 기자의 통장을 탈탈 털어 직접 구매하고 사용해 본 제품들로 일절 광고가 아님을 밝힌다.


    01

    감귤나무 펼쳐진 제주도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는 청춘의 여름날

    이니스프리 만다린 드라이브 (Mandarin Drive) 30ml, 2만 4000원


    출처 = 언스플래쉬, 이니스프리 공식 홈페이지

    탑노트 : 비터 오렌지, 만다린, 그레이프프룻, 레몬

    미들노트 : 바질, 피오니

    베이스 노트 : 세더우드, 모스, 머스크

    따사로운 햇살 아래 제주 해안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감귤나무의 싱그러운 향기. 그 사이로의 드라이브.

    웃음 가득한 여행 청춘 한복판의 청량하고 싱그러운 내음과 간직하고픈 그날의 분위기

    이보다 더 그림같은 설명이 있을까? ‘만다린 드라이브’라는 이름처럼, 오뉴월의 제주도를 상큼한 귤 하나 까먹으며 신나게 달리는 듯한 향이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적당히 따사로운 햇살과 이제 막 배워 조금은 어설프지만, 딱 드라이브하는 데 지장 없을 만큼의 운전 실력을 갖춘 청춘들. 고개를 돌려보면 지천엔 야자수가 널려 있고, 상큼한 귤 냄새와 함께 마치 그들처럼 덜 익은 푸르른 풀잎의 향기가 코끝에 맴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듯한 무한한 자유로움과 상쾌함이 퐁퐁 솟구쳐 오른다. 내가 3초 만에 제주도에 다다르는 방법, 이니스프리의 만다린 드라이브를 뿌리는 것이다. 탑노트의 상큼한 초록이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지만, 곧이어 세더우드와 머스크의 나무 향이 심신의 안정감을 가져다주니 여행 못 가 슬픈 마음을 달래는 아로마 테라피로도 제격.

    Tip: 이니스프리의 향기 제품 라인은 대체로 퀄리티가 좋다. 이니스프리의 모회사인 아모레퍼시픽 조향 라인이 국내에서 가장 크고, 좋은 향료를 쓰기로 유명하기 때문. 해당 향수 말고도 이니스프리의 룸 스프레이나 디퓨저 제품을 여러 개 테스트해 봐도 좋다. 꼭 구매로 이어지지 않아도, 매장을 찾기가 편해 자신의 취향을 가장 쉽고 빠르게 찾는 방법의 하나다.

    02

    고즈넉한 산사의 비에 젖은 유자나무 향

    이솝 테싯(Tacit) 50ml 13만 원


    출처 = 언스플래쉬, 이솝 공식 홈페이지, Amazon

    탑노트 : 유자

    미들노트 : 바질

    베이스 : 베티버, 클로브

    테싯의 향을 맡으면 몇 년 전 여름, 낙산사의 비 오는 새벽이 떠오른다. 당시 복잡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템플스테이를 떠난 적이 있다. 슴슴한 밥을 먹고 가벼운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녘 비 오는 소리에 잠이 깨 버리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찾았을 테지만 그때만큼은 그냥 가만히 문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싶었다. 동도 트기 전, 비 오는 절간에서 젖은 나무와 여름 새벽의 냄새를 가만히 맡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 ‘테싯’이라는 이 향수의 이름은 한글로 풀이하면 ‘암묵’ 이다.

    노트는 단순하지만, 향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자연주의 브랜드로 잘 알려진 만큼 향 역시 군더더기 없는 느낌이다. 탑에서는 초록 유자 향이 터지고, 그 뒤로는 쭉 나무, 나무, 나무의 향연이다. 유자향이 너무 상큼하게 느껴진다면, 같은 브랜드 라인의 ‘휠’이라는 향수도 괜찮은 선택이다. 사람에게 나기엔 ‘너무 나무같다’는 생각에 테싯을 선택하긴 했지만 말이다.

    03

    흔한 벚꽃 말고, 한밤의 벚꽃 향

    아틀리에코롱 앙상 진해(Encens Jinhae) 30ml, 15만 6000원


    출처 = 언스플래쉬, fragrantica

    탑 노트 : 핑크 페퍼, 시칠리아 레몬, 넛맥

    미들 노트 : 벚꽃, 터키 장미, 올리바넘

    베이스 노트 : 향, 패츌리, 샌달우드, 엘레미

    진해? 내가 아는 그 진해인가? 했다면 맞다. 그 진해다. 프랑스 니치 퍼퓸 하우스인 ‘아틀리에 코롱’ 의 조향사 부부가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해의 흐드러지는 벚꽃의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조향한, 한국 헌정 향수다. ‘앙상’이 프랑스어로 ‘향’ 이라는 뜻이니, 직역해 보자면 ‘진해의 향’ 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흔히 벚꽃 하면 떠올리는 핑크핑크하고 청순청순한 이미지는 아니다. 음? 이건 웬 후추 냄새? 그만큼 매캐하고, 쫀득한 장미 잼의 향도 느껴진다. 사실 벚꽃은 향이 없는 꽃이라 ‘체리블러썸’ 이름을 달고 나온 향수들은 대부분 상상에 따라서 만드는 제품이다. 이러한 조향 방법을 이미지 조향이라 일컫는데, 이 제품 역시 그러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작년 진해에 다녀온 내게는 진해 한밤의 벚꽃길을 연상케 하는 향이다. 화창한 한낮의 벚꽃도 너무나 예뻤지만 4월의 쌀쌀한 밤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와 봄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페퍼와 장미 잼의 향은 금방 퍼졌다가 사라지고, 갑자기 어디선가 보드라운 절간의 향이 사르르 피어오른다. 인센스(향) 노트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군항제가 취소됐지만, 벚꽃은 매년 핀다는 말로 위로해 본다. 올해는 ‘앙상 진해’로 아쉬움을 달래고, 내년에 꼭 진해 군항제에 다시 방문할 수 있기를.

    04

    로코코 양식처럼 뽀얗고 물탄 장미비누 향

    불리1803 공원에서의 대화(conversation dans un parc) 75ml, 23만 원


    출처 = 언스플래쉬, 네이버 지식백과 <공원에서의 대화> 항목, 불리1803 공식 홈페이지

    터키산 장미 부케, 베르가모트, 페퍼민트

    바틀마저 박물관 조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불리1803의 이 컬렉션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8가지 그림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공원에서의 대화’ 는 영국의 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동명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로, 보드라운 장미비누 향이 난다. 터키산 장미 부케와 베르가모트, 페퍼민트의 향이라고만 설명돼 있는데, 불리1803의 향수들이 알코올을 쓰지 않은 ‘워터 베이스’ 향수들이라 원료가 단순해서 그렇다. 보통 향수는 지속력을 높이기 위해 알코올 베이스로 돼 있어 처음 뿌리면 머리 아픈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나는데, 불리의 향수들은 말 그대로 ‘물’이라 그런 느낌이 덜하다. ‘공원에서의 대화’ 작품을 보면 산책 중인 연인의 주변에 꽃이 만개해 있고, 흙과 풀이 사람만큼 도드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향 역시 마찬가지로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난다. 로코코 양식 특유의 뽀얗고 우유 탄 듯한 느낌이 향에서도 느껴진다. 워터베이스인 만큼 부담스럽지 않게 뿌릴 수 있고 온 몸에 착향이 가능하지만 대신 지속력은 포기해야 한다. 흔히 ‘현관 컷’ 이라고 말하는 지속력을 자랑하지만, 내 현관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향수 덕후들에겐 아깝지 않은 투자일 터.

    05

    타히티 섬의 환상적인 백사장과 해변을 거니는 향

    샹테카이 티아레(Tiare) 75ml, 26만 5000원


    출처 = 언스플래쉬, 샹테카이 공식 홈페이지

    탑 노트 : 시클라멘, 백합, 이탈리안 베르가못

    미들 노트 : 티아레, 재스민, 일랑일랑, 레드 로즈, 오키드

    베이스 노트 : 머스크, 헬리오트로페, 바닐라

    휴양지와 바다를 사랑해 마지 않는다. 꿈이 하나 있다면, 휴양지 별장을 사 여름마다 유유자적하며 숨어 사는 것이다. 우쿨렐레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에서 바비큐나 잔뜩 구워 먹고, 매일같이 서핑을 하며 따스한 햇살을 온 몸으로 잔뜩 느끼는 것. 상상만 해도 즐겁다. 샹테카이의 이 향수는 마치 내게 그런 기분을 들게 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향수의 주요 향조로 꼽히는 ‘티아레 꽃’은 하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으로, 하와이에서 훌라춤을 출 때 귀에 꽂고 있는 바로 그 노랗고 예쁜 꽃이다. 예전에는 타히티에서만 피는 꽃이었다고 한다. 오죽 향이 좋아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서는 한번 그 향기를 맡은 사람은 세상을 방황하더라도 그 향기가 그리워 다시 타히티로 돌아온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니 말 다 했다. 동남아 또는 발리, 괌 같은 휴양지에서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유유자적 맛사지를 받으며 기분 좋게 뒹구는 듯한 향이다.

    06

    알프스 산맥의 오묘하고 따듯한 설경이 느껴지는 향

    톰포드 솔레이 네쥐(Soleil Neige) 50ml, 30만 8000원


    출처 = 톰포드 공식 홈페이지, 언스플래쉬

    탑 노트 : 베르가모트, 캐럿 씨드

    미들노트 : 재스민, 오렌지 블로썸, 장미, 카르마 플로

    베이스 노트 : 라다넘, 머스크, 벤조인, 바닐라

    하얗고 순수하다. 그동안 톰 포드에서 나왔던 까맣고 빨간 향수들의 바틀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솔레이 네쥐는 제품명부터 ‘태양의 눈’ 이기 때문이다. 스키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쿠쉐벨과 므제브 알프스 산맥의 하얀 설경, 그 위를 비추는 태양의 결을 향으로 표현했다고 하니, 바틀부터 눈 쌓인 알프스 산맥처럼 새하얗다. 향도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눈밭의 향처럼 뾰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곧이어 다가오는 크리미한 바닐라와 벤조인의 향이 묘한 포근함을 선사해주는데, 마치 그런 거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스키를 타며 눈 밭에 뒹구는데 묘하게 추우면서 따듯한 느낌.

    향에서 따듯함과 차가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오묘한 기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보겠다. 어린 시절 수영장에서 온 몸이 차갑게 식은 채로 올라와 수건만 덮고 컵라면을 먹으면 묘하게 따듯해지지 않았던가? 아, 30만 원짜리 톰포드 향수를 뿌리며 떠올리는 것이 초등학교 때 수영하며 라면 먹었던 추억이라니. 어딘가 쓰라리다. 하지만 톰 포드 향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나를 순식간에 동네 수영장에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프랑스 쿠쉐벨의 설원으로 데려다 놓는 이 막강한 요술. 톰 포드가 아니면 그 누가 해 낼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나를 여행지로 데려다주는 향수’ 6가지를 모두 소개했다. 비록 향으로 잠깐 후각적 여행은 떠날 수 있지만, 진짜 여행을 가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건 두말해야 입 아픈 사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좋은 향을 맡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또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기다리다 보면 후각상피세포가 새로 재생될 즈음엔 분명 이 사태가 나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로 맡는 향은 분명 한계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향이 있다면 꼭 한번 직접 코로 들이마시고 느껴 보시길, 그리고 당신들의 ‘프루스트식 순간’을 한번 맞이해 보시길. 아, 물론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된 뒤에 말이다.

    ▶ ‘향알못’들을 위한 몇 가지 설명

    머스크 : 관능적이고 신비한 향. 마치 사람의 살 냄새와 같은 느낌이다.

    세더우드 : 개잎갈나무속 소나무과의 향으로, 마음이 불안할 때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베티버 : 남성 향수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향료로 잔디와 같은 느낌의 향이 난다.

    탑노트 : 향수를 뿌린 직후부터 5분까지 나는 향. 금방 날아간다.

    미들노트 : 조향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조향한, 향수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중심 향이다. 탑노트가 날아가고 30분부터 60분간 지속된다.

    베이스 노트 : 향수를 뿌린 후 2-3시간 후부터 향이 모두 날아가기까지의 향을 말한다.

    박지우 여행+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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