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수 나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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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전 일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려 나서는데 어머니가 서둘러 뒤따라 나오셨다. “밤새 꿈이 뒤숭숭하니 오늘 각별히 몸 조심해라. 어디 나서지도 말고, 길 걸을 때도 안쪽으로 걷고, 뭐 준다고 바로 먹지 말고 또….” 어머니의 신신당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이어졌다. ‘마흔을 훌쩍 넘긴 아들이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 1층까지 내려오면서 난 속으로 궁시렁댔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아파트 단지에는 가을빛이 만연했다. 울긋불긋 단풍에 코스모스와 이름 모를 가을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둑한 새벽녘이라도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는 손색없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된 단풍구경이 어려운 요즘, 이런 소소한 아름다움은 더욱 뜻깊게 여겨졌다. 그렇게 잠시 넋 놓고 걷다가 “악!”하고 외마디를 외쳤다. 보도블럭의 이가 빠진 것을 못보고 헛디뎌 발목이 잠시 꺾였다. 꽤 아팠다. 수 분을 절뚝이며 걸었다. 몸이 반쯤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넘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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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역까지 왔는데도 발목이 후끈거렸다. 조심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개찰구 근처를 지날 때 안내전광판에 ‘당역 도착’이란 메시지가 떴다. 허겁지겁 객차를 향해 뛰었다. 정상적인 발목이 아니다보니 엉거주춤했다. 아뿔싸! 마지막 계단에 발을 내리려 할 때 문은 닫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앞까지 다가섰지만 열차는 출발했다.

    출근길에 뛰는 것도 싫은데, 뛴 보람까지 없으니 맥이 빠졌다. 속에서 짜증이 확 치솟았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5분여가 흐른 뒤 다음 열차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갑자기 내 짧은 머리칼이 잠시 흩날렸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그야말로 쌩하고 빈자리를 찾아 내달렸다. 분명 내 바로 뒤에 있었는데 그렇게 빠를 줄이야. 본능적으로 그 아저씨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이미 아저씨는 눈을 꼭 감은 채 숙면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난 사실 앉을 마음도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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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여곡절 끝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한 시간여의 출근길이 마치 오전 한나절을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컴퓨터를 켠 후 커피를 마시기 위해 텀블러를 들며 일어섰다. 그러다 또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T^$!” 육두문자였다. 텀블러가 비어 있는 줄 알았는데 어제 마시던 커피가 조금 남아있었던 것이다. 바지 밑단과 슬리퍼 속 양말에 커피가 묻었다. 물티슈로 닦았지만 얼룩이 남았다. 결국 화장실에서 질러 빨다 보니 축축한 바지와 양말을 입은 채 근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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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오후 한 홍보회사 팀장과 점심을 먹으며 출근길 해프닝을 털어놨다. 박장대소하던 그는 홍콩의 한 풍습을 내게 알려줬다. 종이에 자신이 겪은 안 좋은 일이나, 자신이 싫거나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구두 뒷굽으로 여러 번 내려치면 일이 잘 풀린다는 미신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홍콩에서는 그 행위를 대신해주는 무속인 같은 이가 따로 있다면서, 실제로 통할지 만무한 일이지만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만으로 인기를 누린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한번 종이에 오늘 에피소드를 쓰고 신발로 즈려밟아 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왔다. 난 손사래를 쳤다. 그냥 흥미로운 액땜 처리라는 것으로 기억하겠다며 웃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이날 난 홍콩의 그 풍습을 따라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조언대로 퇴근 무렵까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했다. 퇴근 후 집에 오면서도 평소보다 신중히 움직였다. 하루의 여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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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되자 어머니의 ‘악몽’, 아니 어쩌면 예지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그 나쁜 꿈과 당부 말씀을 곱씹게됐다. 만약에 내가 어머니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고 출근길 나서길 조심했더라면 발목을 접지르지도, 열차를 놓치지도, 커피를 쏟지도 않았을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머피의 법칙’은 이미 여러번 겪은 바 있다. 심지어 한국이 아닌 해외 나갔을 때 맞닥뜨리기도 했다. 숙소에 여권을 두고 공항에 가거나, 항공사에서 맡긴 짐을 잃어버려 출장 기간 동안 캐리어를 받지 못하거나, 연중 맑은 날이 300일이 넘는 곳이 하필 취재하는 날 폭우가 내려 애를 태운 바 있다.

    하지만 어려움 뒤에는 반드시 희망 내지는 탈출구가 뒤따랐다. 숙소에 여권을 두고 왔을 때는 조금 늦게 출발한 숙소 측 관계자가 챙겨줬고, 캐리어가 오지 않았을 때는 호텔리어가 생필품을 전해줬고, 폭우가 내린 날에는 현지 코디네이터의 안내로 비만 오면 볼 수 있다는 드문 광경을 취재할 수 있었다.
     
    어르신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역시 옛말은 틀린 법이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한 누군가의 말도 머리를 맴돌았다.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던 그날을 떠올리면 한 여름밤의 꿈, 아니 한 가을밤의 꿈을 꾼 듯 하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좋아하는 여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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