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가들의 안식처에서 건축 여행자들의 순례지로
파리의 에펠탑, 니스의 해변, 프로방스의 목가적 풍경. 프랑스 여행의 클리셰를 벗어나 새로운 영감을 갈망하는 건축·인테리어 애호가들을 위한 프랑스 여행지가 있다. 크루아 마을에 자리 잡은 빌라 카브루아다.

크루아는 프랑스 북부의 오드프랑스 지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녹음이 우거진 거리를 따라 멋스러운 빌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세기말 산업혁명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크루아는 프랑스 내에서도 부촌으로 꼽힌다. 자산가들의 안식처에서 건축 여행자들의 순례지가 됐다. 19세기 말, 성공한 공장주와 상인들이 하나둘 크루아에 터를 잡았다. 덕분에 크루아에는 근대적 빌라와 세련된 저택들이 들어섰다.
빌라 카브루아는 크루아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 있다. 노란 벽돌로 지어진 60m 길이의 장대한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32년 완공된 빌라 카브루아는 건축가 로베르 말레-스티븐스가 남긴 가장 강렬한 작품으로 꼽힌다.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 말레-스티븐스는 1920년대부터 파격적인 건축 양식으로 주목받았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기능성과 단순성을 중시한 건축 운동이다. 전통적인 장식을 배제하고 효율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빌라 카브루아는 부유한 직물 공장 소유주 폴 카브루아 가문을 위해 지어진 대저택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북부 릴 지역은 공장 지대로 악명 높은 대기 오염에 시달렸다. 사업 성공으로 부를 축적한 카브루아 가문은 이러한 도시 환경을 벗어나고자 했다. 폴 카브루아는 깨끗한 환경을 찾아 릴 외곽으로 이주를 결심했고, 결과물이 바로 빌라 카브루아다. 대규모 저택과 넓은 정원을 갖춘 이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이 적용된 다양한 편의 시설을 자랑한다. 빌라 외관과 내부는 산업화 시대 부르주아 계층의 생활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파리와 크루아를 잇는 건축 거장의 발자취
로베르 말레-스티븐스의 명성은 프랑스 전역을 물들였다. 파리에 말레-스티븐스 대로라는 길이 있다. 말레-스티븐스 대로는 파리 16구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파리 서쪽 고급 주거 지역인 오퇴유 지역 근처에 있으며, 1927년에 말레-스티븐스가 계획하고 설계한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작은 거리다.
폴 카브루아는 말레 스티븐스를 1929년 파리 건축 전시회에서 만났다. 카브루아는 전시장에서 말레-스티븐스의 작품에 매료됐다. 말레 스티븐스는 1920-30년대 아방가르드한 스타일로 유명한 프랑스 건축계의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던 건축계의 이단아였다. 카브루아는 말레 스티븐스에게 1929년 자신의 저택 설계를 의뢰했고, 3년 뒤 빌라 카브루아가 탄생했다. 말레-스티븐스의 독특한 이력이 빌라 카브루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시절 파일럿으로 하늘을 날았던 경험이 그의 건축 철학에 날개를 달아준 것.
대저택의 규모는 2800㎡(약 847평)에 이른다. 직선과 기하학적 패턴이 돋보이는 외관은 마치 거대한 배를 연상시킨다. 건물 곳곳에 설치된 테라스와 발코니는 실내외 경계를 허물었다. 건축가의 손길은 외관에 그치지 않았다. 가구부터 작은 소품까지 모든 인테리어 요소를 직접 설계해 공간의 완성도를 높였다.
정원과 실내를 연결하는 거실의 통유리창은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설계됐다. 가족 구성원별 공간 분리도 눈에 띈다. 부모와 자녀, 직원들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아이들 식당에는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거울을 설치했다. 어른들 식당에선 큰 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볼 수 있다.
건축가의 섬세한 디테일
영화 세트 디자이너였던 말레-스티븐스는 스크린 속 구조물에서 영감을 얻어 실내 디자인을 완성했다. 건축가의 시그니처인 ‘선’의 미학은 벽돌 시공에서 극대화됐다. 말레-스티븐스는 벽돌과 벽돌이 만나 하나의 선을 그리고자 했다. 벽돌과 벽돌 사이 하얀 줄을 최대한 가늘게, 가로 선은 굵은 검은색으로 강조해 리듬감을 살렸다.
정원은 활주로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카브루아는 말레-스티븐스와 함께 각지를 돌며 취향을 공유했고, 노란 벽돌도 두 사람의 교감에서 탄생했다는 후문이다.
주방의 혁신적 설계도 눈에 띈다. 당시 대저택의 하인 공간과 달리 넓은 창과 쾌적한 동선을 자랑한다. 보모가 정원에서 노는 아이들을 살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곡선 처리된 타일과 세라믹 소재는 청소의 편의성까지 고려했다. 주방 수도꼭지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정수 시스템이 도입됐다. 찬물, 온수와 함께 정수된 물이 나오는 수전 3개가 설치됐고, 지하에는 정수 설비까지 갖췄다.
아이들과 어른의 식당도 분리됐다. 아이들 식당 테이블 아래는 쏟은 음식 처리가 쉽도록 철제 소재를 썼다. 벽면 그림을 모든 아이가 감상할 수 있도록 천장에 거울을 달았다. 어른들의 식당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큰 창을 뒀다. 말레-스티븐스는 정원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겼다.
빌라 카브루아에서 만나는 럭셔리한 건축 디테일
부부 침실은 넓은 창문과 고급 목재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빌라 카브루아의 공간을 수놓은 4가지 대리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흰색과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대비가 모던함을 선사하고, 초록빛 무늬가 살아있는 자연석은 정원의 푸르름을 실내로 끌어들인다.
섬세한 패턴이 돋보이는 대리석은 격조 높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각각의 공간마다 다른 매력으로 풍부한 질감을 연출한다. 초록빛 무늬 대리석은 창 너머 정원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실내 디자인의 연속성을 완성했다. 건축가가 사랑한 ‘선’의 미학은 타일 배치부터 바닥재 시공까지 구현됐다.
거실은 높은 천장과 탁 트인 창이 연출하는 개방감이 돋보인다. 자연광이 가득한 거실에는 초록빛 인테리어와 고급 가구가 조화롭게 배치됐다. 각 구역은 용도에 맞게 세심하게 구분됐다. 가족들의 담소 공간, 손님 접대 구역, 사무 공간까지 동선과 기능을 고려해 배치했다.
서재는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화려한 무늬를 최소화했다. 카페트로 발소리를 차단하고, 섬세하게 조정된 조명으로 업무 효율을 극대화했다.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색감과 라인이 돋보인다.
건물 전체에 적용된 기하학적 패턴은 시각적 리듬감을 선사한다. 외벽의 노란 벽돌은 햇빛에 따라 다채로운 색감을 연출하며, 테라스와 발코니의 철제 난간은 산업 시대의 미학을 대변한다. 건축가는 동선과 공간 활용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각 층을 연결하는 계단과 통로는 자연광이 쏟아진다.
혁신적 기술의 집약체
말레-스티븐스는 기술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질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했다. 각 방마다 설치된 전화기와 라디오는 현대적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원형 디자인의 라디오는 노르망디 유람선의 둥근 창문에서 영감을 얻었다.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는 말할 것도 없다.
27m 길이의 수영장도 당시로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1930년대 당시에는 집에 개인 수영장을 설치하는 것이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스포츠를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 수영장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부르주아들은 점차 자신의 저택에 개인 수영장을 짓기 시작했다.
시간을 초월한 디자인
빌라 카브루아는 1990년 프랑스 정부가 역사건축물로 지정하며 보존 가치를 인정했다. 2000년대 초반 정부 관리로 넘어간 빌라는 13년에 걸친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로 원형을 되찾았다. 잃어버린 가구와 예술품도 구입과 복제를 통해 재현했다. 2015년 6월, 대중에게 문을 연 빌라는 내년이면 개관 10주년을 맞이한다. 건축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말레-스티븐스의 디자인 철학은 르 코르뷔지에의 ‘자유로운 파사드’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빌라 카브루아는 100년 전 혁신과 현대 건축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통해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넓은 공간을 여유롭게 둘러보려면 최소 2-3시간이 필요하다. 정원에서 바라보는 건물 전경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다. 계절과 시간대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도 잊지말고 담아보자.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혁신성을 간직한 곳, 프랑스 북부 여행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다.
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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