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볼만 한 그곳
키프로스, 그동안 왜 몰랐을까
짙푸른 바다에 파도가 휘몰아치자 하얀 거품이 일었다. 그렇게 파도가 부서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갑자기 한 여인이 큰 조개를 발판삼아 물 위로 솟아올랐다. 그가 바로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으로 일컫는 아프로디테(Aprodite)이다. 영미권에서는 비너스(Venus)라고도 부른다.
그녀의 탄생은 여러 화가들이 작품으로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다.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역사상 최고의 미모라 할 수 있는 여인, 아니 여신이 탄생한 그곳이 어디일지 말이다.
키프로스(Cyprus), 영어명 사이프러스인 지중해의 섬나라가 그곳이다. 정확히는 그리스에서 동쪽, 튀르키예에서 남쪽에 자리한다. 지금은 그리스가 남쪽, 튀르키예가 북쪽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며, 대한민국 북한, 중국 대만과 함께 세계 3대 분단 지역이기도 하다.
아프로디테의 고향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은 꽤나 힘들었다. 인천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비행기로 10시간 30분, 도하에서 키프로스까지 또 4시간가량 날아갔다. 긴 비행 끝에 공항에 첫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헤르메스 공항(Hermes airport)이란 이름이었다. 아프로디테의 탄생지라더니 공항 이름마저 신(神)으로 지었나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를 맡은 알렉시아 크리스토둘루는 “흔히 떠올리는 명품 브랜드가 아닌 ‘전령의 신’ ‘여행‧상업의 신’인 헤르메스에서 이름을 따와 공항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키프로스에 머무는 내내 주요 건물이나 쇼핑몰 등의 이름에서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이름을 꽤 접할 수 있었다. ‘신의 나라’라 불리는 그리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발길 닿는 곳곳이 신과 인연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본격적으로 아프로디테의 흔적을 따라 나섰다.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바다가 있는 파포스 (Paphos)의 남쪽으로 내달렸다. 키프로스는 섬나라답게 아름다운 해변이 즐비하다. 하와이나 제주도의 해안도로를 떠올리면 된다.
아프로디테의 탄생지는 십 수 계단을 내려가야 모습을 드러낸다. 해변이라기에는 규모가 아담한 편이다. 어린 아이 손톱 굵기만 한 모래와 함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려 있다시피 하다. 하지만 꽤 몸집이 큰 바위 하나가 시선을 끈다. 아프로디테 탄생바위라 불리는 페트라 투 로미우(Petra tou Romiou)다.
이 바위가 특별한 것은 오랜 전설 때문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 바위 근처에서 알몸으로 수영하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가이드 알렉시아는 “수심도 깊고, 파도도 센 곳이라 수영에 나서면 위험하다”며 전설과 현실에 선을 그었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서는 이곳을 함께 오는 것만으로 사랑이 깊어진다는 분위기라고 그는 귀띔했다. 이날도 바위를 중심에 두고 곳곳에서 연인들의 키스가 이어지는 것은 물론, 가족들의 화목한 모습이 펼쳐졌다.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고, 사랑에 진심인 자에게는 소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페트라 투 로미우에서의 사랑 고백이 분명 이곳을 찾는 이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선사했으리라.
아프로디테와 관련해 놓치면 안될 스폿이 하나 더 있다. 아프로디테가 목욕을 했다고 알려진 아프로디테 연못(Baths of aphrodites)이다. 탄생지 바다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북서쪽으로 가면 나온다. 이곳엔 아프로디테 길과 그의 연인 아도니스의 이름을 딴 아도니스 길로 나뉘어 있다. 현지인들이나 관광객들에게 트레일 코스로 유명할 만큼 주변이 아름답고 코스도 아기자기하다. 걷는 맛이 있는 곳이란 얘기다.
연못까지 가려면 30분 넘게 산길을 올라야 한다. 크기는 자그맣다. 무화과나무가 짙게 우거져 뭔가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전설도 내려온다. 여기 물로 3번 세수를 하면 다산(多産)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 꼭 다녀가야 하는 곳이 아닐까란 생각이 잠시 스쳤다.
여러 전설을 뒤로한 채 지중해가 감싸고 있는 키프로스의 진짜 바다를 만나러 발길을 돌렸다. 키프로스의 바다하면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블루 라군과 수중박물관이다. 이 두 곳을 즐기려면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가야 한다. 이른바 끝장 대결이다.
키프로스의 가장 서쪽, 우리식으로 부르자면 땅끝마을이라 할 정도의 지역은 아예 지명 자체가 블루 라군(Blue lagoon)이다. 물론 영화 ‘블루 라군’의 실제 촬영지는 몰타나 피지였지만 그에 버금가는 풍광을 자랑한다.
유람선을 타고 1시간여 바다를 향해 나가면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곳에 정박한다. 물 만난 물고기마냥 너나 할 것 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한 선원은 운이 좋으면 돌고래도 볼 수 있고 같이 수영도 할 수 있다며 행운을 빌기도 했다. 스노클링부터 스쿠버다이빙에 바다낚시까지 이곳에서 만큼은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냥 ‘자유’다.
좀 더 이색적인 바다는 정 반대인 동쪽 끝으로 가야한다. 수중박물관인 무산(MUSAN‧Museum of Underwater Sculpture Ayia Napa)을 만나기 위해서다. 아이아 나파 해변에 도착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물속 수중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스노클링 유경험자가 유리하다. 물론 초보자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쉽지는 않다. 박물관이 있는 곳까지 200여m를 수영한 뒤 수심 10m 가량을 내려가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일단 모든 장애를 해결하고 물속에 들어가면 기가 찬다. 해저 8~10m에 만들어 놓은 100점에 가까운 조각상들과 산호초의 조화는 여느 전시 이상으로 남다르다. 조각상 하나하나에 이야기까지 담겨 있는 듯 해 뭉클하기도 하다.
여기까지 봤는데도 바다에 대해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면 한방에 매조지를 지을 수 있는 스폿이 있다. 페게이아(Pegeia) 해변에 쉬고 있는 난파선 에드로 3호(Edro III)와의 조우다. 2011년 8월 좌초한 2500t급인 이 배는 여러 번의 견인 노력이 있었지만 좌초한 그대로를 유지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후 일몰 때만 되면 관광객은 물론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붉은 해가 난파선과 함께 떨어지듯 담는 한 장의 장면은 어느 곳에서도 포착하기 힘들 포토제닉감이다.
수천 년 전 아프로디테를 따라 나선 키프로스에서의 여정은 간절히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처럼 찌릿함의 연속이었다. 그를 상징하는 꽃인 장미와 같다고 할까. 탄생바위나 연못을 보면서는 달콤했고, 블루 라군과 무산에서는 강렬했으며, 난파선 에드로3호와 함께한 해넘이 때는 뭉클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바다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가 키프로스에 봄을 한가득 안아다 준 것처럼 말이다.
키프로스 /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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