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여학생들의 로망은 단연 뉴욕이었다. 미드 좀 본다고 하던 아이들은 ‘섹스 앤 더시티’를 정주행하고 극장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보고 ‘가십걸’을 졸업했다. 부모님께서 인터넷 강의 보라고 사주신 PMP 안에는 시리즈 별로 잘 정리된 미드 파일이 가득했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 있게 될만큼 커버린 그들은 뉴욕으로 날아 ‘섹 앤 시’ 캐리처럼 길거리에서 베이글을 먹기도 하고 야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에디터의 친구는 직장생활을 몇년 한 후에 우연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봤더니 주인공보다도 악역으로 비치는 사수 에밀리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고 한다. 사족이 길었다.
80,90세대의 로망 뉴욕은 가고,
MZ 세대의 로망 파리가 온다.
요즘 미드 좀 본다는 여학생들이라면 벌써 봤다는 드라마가 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에밀리, 파리에 가다’ (Emily in Paris). 15일 기준으로 국내 넷플릭스 TV 쇼 인기 순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넷플릭표 드라마다. 부리나케 제작자가 누구인가 찾아봤더니, 그 유명세가 수긍이 간다. ‘섹스 앤 더 시티’를 제작했던 유명 프로듀서, 대런 스타가 또 한 번 역작을 기획했다고.
그래서 제가 한 번 봤습니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 아닌데 정신 차리고 보니 8화까지 봤더라. 여우 같은 파리지앵 동료들의 직장 내 따돌림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좋은 성과를 보여주는 미국인 여자 주인공 에밀리가 그렇게 기특하고 예쁠 수가 없다. (프랑스인들이 미국인들을 무시하는 클리셰들이 몽땅 등장한다.) 혼을 쏙 빼놓는 외모의 남자 주인공인 가브리엘, 그리고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에 눈정화를 한 것은 덤이다.
‘내가 갔던 파리의 모습이 정말 그러했던가..파리의 남자들이 정말 저렇게 생겼었던가…’ 파리에서의 기억이 썩 좋지 않은 이들이 본다면 나쁜 기억도 절로 무지개 빛으로 미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정말 ‘에밀리, 파리에 그다(Emily in Paris)’는 MZ 세대들에게 먹히는 드라마일까?
드라마가 넷플릭스에 공식 출시된 일자는10월 2일.
발빠른 MZ세대가
드라마 콘텐츠로
인플루언서가 되기까지
2주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Moritz_hau
내가 파리의 가브리엘
나의 에밀리는 어디 있니?
반짝반짝 빛나는 에펠탑 앞에 선 풋풋한 10대 청년이 말한다. “나는 파리에 있는데, 나의 에밀리는 어디 있지?” 며칠 만에 영상 조회 수는 300만 회를 훌쩍 넘어섰다. 그의 이름은 Moritz. 파리에 살고 있는 독일인 모델이다.
준 인플루언서급이었던 모리츠는 에밀리를 찾음과 동시에 자연스레 자신을 ‘가브리엘’과 동일시하는데 성공했다. 댓글 창은 난리가 났다. 프로필 사진을 보니 단연 10대-20대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대부분. 한국인의 댓글도 보인다.
내 이름 방금 에밀리로 바꿨음
파리로 이민갈거임
결혼하자는 건가…?
그는 드라마 속에 나오는 장소들을 거닐며 ‘1인칭 여친 시점’ 콘텐츠를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모리츠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화보집을 판매한다”며 열렬히 팔이피플의 면모까지 보이고 있다. 머리 참 잘 쓴 영리한 밀레니얼 세대, 인정합니다.
@Karinalbertovna
상큼한 미소가 매력적인 카리나는 러시아에서 파리로 경영학을 공부하러 온 외국인 유학생이다. 카리나는 19년도 겨울부터, 그러니까 1년 동안 꾸준히 (매우 열심히) 틱톡 콘텐츠를 올렸는데 조회 수가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밀리, 파리에 가다’ 드라마에 나오는 장소들을 그대로 보여준 콘텐츠가 270만 회 조회수를 달성하며 그녀의 계정도 로켓 성장세를 보였다.
드라마 속 에밀리가 가는 베이커리, 그녀가 사는 주택가, 회사, 공원 등 모든 장소들을 직접 가보며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카리나는 이 기세를 몰아 시리즈별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영상 속 카리나는 늘 두리번거리는, 무언가를 찾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드라마 남자주인공 ‘가브리엘’을 찾는 중이라고. (..모리츠를 만나면 되겠네요!)
파리에 진짜 가브리엘이 있나요?
드라마 촬영지에 직접 가보며 즐거워하는 카리나의 순박한 모습을 귀여워하는 프랑스 팬들도 많아 보인다. 콘텐츠마다 가장 많은 공감을 얻는 댓글은 역시 “파리에는 정말 가브리엘 같이 생긴 남자들이 있냐”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Yes라는 답글은 달지 않았다. 아직은 찾지 못했나보다. 훈남이 많으면 무엇하리오. 내 짝이 아닌데.
@Victoriachmel
파리에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콘텐츠가 된다는걸 몸소 보여주는 계정이다. 메트로를 타고 가다가 찍어 올리는 에펠탑, 센강에서의 피크닉, 노상 카페에서의 에스프레소 한 잔. 모든 것들이 세계인들의 이목을 끄는 콘텐츠가 된다.
그만큼 파리를 동경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딱히 얼굴이 나오지 않아도, 멋진 옷을 입지 않아도 일상적인 파리의 풍경을 담는 것만으로도 ‘인플루언서’가 되는 파리지앵도 있다.
드라마로 본 파리의 모습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면 손바닥만한 화면 속, SNS 세상의 파리는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나고 재밌는 것이 사실!
드라마의 아쉬움을 달래는 법을 우리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드라마 캐릭터를 그대로 따와 인터넷 소설을 쓰는 아마추어 작가도 있었고 하고 자체 굿즈를 만들어 공동구매를 하는 팬들, 아직도 있다.
MZ세대는 웰메이드 콘텐츠를 본 후 그들만의 콘텐츠로 소화해 놀이처럼 향유한다. 인플루언서들의 예시 외에도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연기를 한다거나 OST 노래를 부르고 유행하는 춤을 따라추는 식이다. 누군가는 틱톡커들의 콘텐츠를 보고 “오글거리는 흑역사”라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시절 우리들의 싸이월드 일기장과 비슷한 것 아닐까. 그 때는 마냥 재밌고 몰랐지만 지나고나니 치기어린 생각이 부끄럽고 웃긴 나만의 추억 같은 것. 어찌됐든 취향의 역사를 남겨두는건 지나고보니 참 값진 일이더라.
틱톡은 이미 성장할대로 성장했고,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
배혜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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