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시 읊는 카페 노포와 첨단기술의 만남 무료 전시부터 족발반미까지 족발·예술·기술의 기묘한 동거 5회 맞은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
가을 문턱, 서울 장충동이 예술의 향기로 물들었다.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의 야심작, ‘2024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이 오는 13일까지 도시의 일상을 예술로 채색한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은 ‘파라다이스 아트랩’은 예술과 기술을 융합한 아트&테크(Art&Tech)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이다. 지금까지 36개 작품이 이곳을 거쳐갔고, 누적 관객 수는 9만6000여 명에 달한다.
올해 무대는 특별하다. 페스티벌은 지난해까지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만 열렸지만 올해는 파라다이스 그룹 본사가 자리한 장충동 일대를 예술의 무대로 삼았다.
더욱 흥미로운 건 장충동 부지의 미래다. 곧 새로운 파라다이스 호텔이 들어설 예정인 이곳에서, 미래의 청사진이 예술 형태로 먼저 그려지고 있다. “더 즐거운 일터를 꿈꾸며 시작했다”는 재단의 말처럼, 이번 축제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점심 식사와 커피 한 잔 사이, 혹은 잠깐의 산책과 휴식 틈새에 예술적 영감이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이 축제의 숨은 포부다.
2019년 인천 영종도에서 ‘쇼케이스’로 첫발을 내딛은 이 축제는, 2020년부터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했다. 매년 10개 작품을 엄선해 선보이는데, 올해는 4개 공간에 작품들을 분산 배치했다. 파라다이스의 ‘P’를 따서 만든 P1~P4의 공간이 있다. 마치 동네 전체가 하나의 갤러리가 된 듯하다.
지갑은 가볍게, 마음은 풍성하게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1, 2번 출구를 나서면 축제 분위기가 방문객을 반긴다. 전시장을 찾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오가는 인파와 외국인 관광객의 활기찬 모습이 자연스레 길잡이가 된다.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미 축제 중심에 서 있다. 페스티벌과 전시장 입장은 무료다.
아트와 테크의 만남
페스티벌의 백미는 아티스트 10팀이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실내외 곳곳에 숨어있는 이 예술적 보물들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P1 건물 메인 전시관에서는 손여울 작가의 ‘주거공간의 자연의 결(Weather Woven Living)’이 관객을 맞이한다. 날씨 데이터를 활용해 환경에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이다. 기후 변화에 따라 색과 형태를 바꾸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가 직접 개발한 기상 프로그램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해 작품의 진정성을 더했다.
P1 지하에서는 전형산 작가의 ‘배타적 이접들#2; 바람의 속삭임’이 펼쳐진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16개의 움직이는 스피커와 안테나로 구성됐다. 작품은 관객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소리의 숲을 만들어낸다. 개인의 목소리가 쉽게 사라지는 현대 사회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옆에는 메르세데스-벤츠 공식 딜러 한성자동차와 파라다이스 아트랩이 협업해 전시한 미술 영재 지원 프로그램 ‘드림그림’ 장학생들의 AI 활용 작품이 있다. 전시에서 드림그림 장학생들은 ‘Dream as ROLA’라는 주제로 포스트 석유 시대의 신인류를 표현했다.
P2 건물 2층엔 조수민·바조우 팀의 ‘M1%RROR’가 장악했다. 이미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한 인증샷 명소다. 다중 디스플레이와 특별 제작된 거울들로 구성된 설치 미술로 ‘상처’를 테마로 한다. 면도날을 하트 모양 거울 옆에 배치한 의도가 흥미롭다. 사랑할 때 상처에 집중하기보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화면 속 춤추는 여성. 유명 댄서 립제이와 협업으로 탄생한 영상이다. 파인애플 이미지도 등장한다. ’괜찮다(fine)‘는 위로의 메시지를 담았다. 독특한 작품은 두 작가의 만남에서 탄생했다. 한 명은 음악을, 다른 한 명은 공간 디자인을 맡았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협업이 이런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P4 건물 3층에서 기어이 스튜디오의 ‘슬릿(Slit)’이 관객을 기다린다. AR 기술로 구현한 이 작품은 도심 속 초현실적 감각을 놀이처럼 즐기는 예술 체험이다. ‘슬릿’은 인간을 닮고 싶어 하는 귀여운 생명체다. 관람객은 스마트폰을 들고 전시장을 누비며 QR 코드를 스캔해 슬릿의 세계를 탐험한다. 별도 앱 설치 없이 웹으로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P4 건물 1층에는 이진 작가의 키네틱 로봇 작품 ‘모프(MORPH)’가 있다. 36개 삼각형 조각으로 구성된 이 기하학적 구조물은 사람이 다가가면 형태와 움직임을 바꾼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인간과 닮지 않은 디자인을 선택했다. 로봇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정서적 교감이 물리적 유사성에 기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술적 제약으로 실시간 반응은 어려웠지만, 불규칙하게 변하는 불빛과 움직임으로 관객과 소통한다.
P4 지하 1층에서는 박승순 작가의 ‘스위트홈 에프엠(SWEETHOME.FM)’이 1930년대 경성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장충동 일대 문화주택에서 인텔리 음악가들이 교류하던 ‘스위트 홈’을 재현했다.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활용한 짧은 드라마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음악가들의 선택을 현대적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체제에 순응할 것인가, 자신의 색을 지킬 것인가?” 작가는 도발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지역 명소, 문화의 주역이 되다
장충동 지역 명소인 태극당과 커피빈 동대입구역점도 축제에 동참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곳은 3대째 이어온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 태극당이다. 1946년 명동에서 첫 발을 내딛은 이 베이커리는 1973년 장충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번엔 P3 전시관이라는 새 옷을 입었다.
태극당 2층에 오르면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오주영 작가의 ‘1974 장충동: 문학소녀의 비밀편지’가 관객을 70년대로 안내한다. 1974년 장충동은 문화의 용광로였다. 도시적 삶에 대한 열망과 낭만, 그리고 치열한 현실이 공존하는 이 거리에서 문학소녀들의 펜촉은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오늘날 대중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연서와 사랑 이야기가 당시 인기였다. 재미있는 건 이 소설들이 주로 빵집에서 시작됐다는 점. 따뜻한 빵과 우유를 먹으며 로맨스가 탄생했다. 전시장에는 실제 여학생 잡지, 전국 여고 학생 콩쿨 입선작, 그리고 작가 할머니 일기장 등 귀중한 자료들이 모여있다. 전시의 숨은 주인공은 작가의 할머니다.
이 프로젝트는 작가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작품 활동을 뒤늦게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작품은 인공지능(AI)과 광학문자인식(OCR) 기술을 활용했다. 문학사에서 조명받지 못한 여류작가와 문학소녀들의 수필을 현대에 되살린다.
관람객들은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문학을 학습한 생성형 AI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키워드만 입력하면 그 시대의 감성을 담은 문학적 언어로 응답한다. 비록 현대의 챗GPT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그 시대 여류 작가들의 말투와 감성을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다.
장충동 밤을 수놓는 미식과 미디어 아트
축제는 미식의 즐거움도 놓치지 않았다. 전시관 외부에서 장충동 테마의 특별 메뉴를 선보인다. 지역 맛집 4곳(우리예술, 우레카츠, 꿀건달, 을지도)과 협업해 개발했다. 족발 반미, 막걸리 슬러시, 꿀 아이스크림 등 시그니처 메뉴를 활용한 감각적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매일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미디어 파사드가 펼쳐진다. 지역 역사문화 이야기와 AI 애니메이션을 담아 가을밤 낭만을 더한다. 김보슬, 정윤수, 업체(eobchae) 3팀의 미디어 아트 작품이 순차 상영된다.
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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