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원주 뮤지엄산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堵忠雄)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미 과거부터 일본, 중국, 프랑스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연 바 있지만 그 자신이 설계한 공간에서의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81세다. 68세와 73세에 암 투병만 두 번, 대수술 끝에 담관과 췌장 등 5개의 장기를 떼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인생은 지금부터’라며 꺾이지 않는 의지와 열정을 간직한 그의 이번 전시에 ‘청춘’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은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본관 총 세 군데의 전시실에서 안도 다다오가 건축가로서 만들어낸 작품들의 도안, 모형, 건설 과정이 담긴 영상 등을 만날 수 있다. 본래 7월 30일까지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3개월만에 15만 명이 방문하는 등 성원에 힘입어 오는 10월 29일까지로 일정을 연장했다.
평일에는 오후 1시 30분, 주말에는 오후 1시 30분과 3시 30분에 전문해설사가 투어를 진행한다. 혹시나 투어에 참가하지 못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전시관 곳곳 QR코드를 찍어 배우 정경호가 녹음한 오디오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본관 앞 워터가든에 놓인 뮤지엄산의 상징 아치웨이(Archway). 12개의 거대한 파이프로 만든 붉은색 관문을 지나 본관에 이르면 푸른 사과 조형물이 방문자들을 맞는다. 작품의 이름은 이번 전시의 부제와 동일한 청춘, 안도 다다오 본인이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오브제다. 안도 다다오가 제작한 오브제를 영구 설치한 것은 효고현립 미술관, 나카노시마 어린이 책의 숲 도서관에 이어 세계 세 번째다.
어째서 푸른 사과인가.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장 달콤하게 잘 익은 붉은 사과보단, 미숙하고 신맛이 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찬 파란 사과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청춘의 정신”이라 밝힌 바 있다. 전시관 여기저기에서도 작은 크기의 푸른 사과 오브제를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청조갤러리1에선 ‘공간의 원형’이라는 주제로 안도 다다오가 건축가로 일하기 시작한 1969년도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작품들에 관한 자료들이 모여있다. 각 건물의 평면도, 입면도, 조감도 등 여러 설계도면과 함께 나무로 만든 모형을 함께 제시해 감상자의 이해를 돕는다. 작품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택들 사이 교회, 절 같은 종교 건축물들이 시선을 끈다.
청조갤러리2로 넘어가면 하나의 건물을 넘어, 섬 전체를 예술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나오시마 프로젝트(直島プロジェクト) 관련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 초입에는 1987년부터 최근까지 섬에 차근차근 들어선 8개의 건물을 모형과 함께 보여준다. 어두운 안쪽 공간에는 한쪽 벽 전체에 나오시마의 경관을 보여주는 영상을 재생하고 그 앞으로 두 개의 거대한 조형물을 배치했다. 각각 나오시마의 디오라마, 프로젝트의 주요 건물인 베네세 하우스(ベネッセハウス) 모형이다. 반대편 벽에는 섬에서 찍은 사진들을 걸어둬 나오시마라는 지역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두 번째 전시관을 빠져나와 마지막 전시관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특별코너 ‘한국의 안도 다다오 건축’이 마련되어 있다. 제주 본태박물관이나 서울 LG아트센터 말고도 여주에 두 개나 되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전시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들은 추후 이곳에서 소개하는 공간들로 직접 여행을 떠나봐도 좋을 것 같다.
그 외에도 흡사 로마 판테온(Pantheon)을 떠오르게 하는 백남준관, 유명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의자들을 모아둔 또 하나의 특별코너를 지나면 마지막 전시관 청조갤러리3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선 ‘풍경의 창조’, ‘도시에 대한 도전’, ‘역사와의 대화’라는 세 가지 주제로 안도가 나오시마 프로젝트 이후 작품과 도시, 지역공동체를 조화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에 주목한다. 스케일이나 디자인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처음 전시관에서 보았던 작품들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으니 두 곳을 오가며 비교해보면 좋다.
전시는 전시관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시가 이뤄지는 건물 자체가 이미 그의 건축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인 탓이다. 복도를 지나며, 계단과 경사로를 오르내리며, 하다못해 벤치에 앉아 쉬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미 전시를 체험하는 것과 다름없다.
뮤지엄산은 이름처럼 해발 275m 수래봉 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무섭도록 비가 쏟아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한점 없이 개거나 갑자기 안개가 끼는 등 관람하는 내내 변화무쌍한 날씨와 마주하게 된다.
그때마다 건물은 그 얼굴을 바꾼다. 바람과 빗방울에 물 표면이 춤추고, 회색의 콘크리트는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든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도 건물에 머무르며 그 변화를 감상할 때 전시는 비로소 완성된다.
청조갤러리3을 나와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뮤지엄샵이 나온다. 엽서, 액자, 포스터 등등 여느 미술관에도 있는 굿즈들 사이로 조금 특별한 상품이 눈에 띈다. 바로 안도 다다오가 그린 뮤지엄산 본관의 스케치 원본이다. 단 2장만을 한정 판매하는데 가격은 무려 장당 600만원이다.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다면 아래 조금 작은 크기의 스케치 작품이 들어있는 도록을 살펴보자. 드로잉은 총 6종류며 100권 한정으로 친필 사인도 적혀있다. 도록은 권당 약 4만 원 정도라 기념삼아 구매해봄직 하다.
놓칠 수 없는 신상공간, 빛의 공간 파빌리온
개
관 5주년에 이어 개관 10주년인 올해에도 뮤지엄 산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생겼다. 플라워 가든 초입,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조각공원에 들어선 빛의 공간 파빌리온이다. 용도는 명상관과 마찬가지로 명상 공간이지만, 원형과 곡선이 돋보이는 명상관과는 달리 사각형과 직선을 강조한 모습이다.
안도는 이 건축물을 설계할 때 주변 환경과의 조화보단 건물의 내면, 공간 자체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공간의 원형이란 무엇인가’라는 건축의 근원적인 질문에 오로지 공간에 비치는 빛의 모습만을 고민하며 도출한 답이 바로 이 파빌리온이다.
대표작인 빛의 교회 설계 당시 건축주인 신자들의 반대로 무산됐던 유리 없는 십자가를 마침내 구현했다. 어떤 장식도 음악도 없는 정적인 공간이지만 은은하게 들어오는 빛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인증샷도 좋지만 아무도 없는 빈 파빌리온에 가만히 서서 건축물이 주는 울림을 온전히 느껴보면 좋겠다.
안도 다다오의 이번 전시는 그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전’이 아니다. 그가 걸어온 길을 눈으로 좇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기회다. 건축전시에 사람을 불러 모으려면 상당히 과감한 일을 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이번에도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전시를 준비했다.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살 청년보다 예순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사무엘 울만, 청춘 中
‘100세 시대’라는 세간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도 다다오에게 남은 시간은 약 20년. 그는 그 시간을 계속해서 청춘으로 살아갈 것이다. 정반대로 70, 80년의 세월을 남겨둔 우리는 과연 여든의 노장보다 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처럼 늙고 싶다 말하겠지만, 관람을 마친 이들의 마음 속엔 다다오처럼 ‘젊고 싶다’는 꿈이 깃들지도 모르겠다.
글, 사진=강유진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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