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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바에서 즐기는 독서 삼매경

장주영 여행+ 기자 조회수  

동진 영화평론가는 최근에 한 인터넷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영화는 말하자면 술 같은 것이고, 책은 물 같은 것이다. 책은 우리를 좋은 의미에서 차갑게 하고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뜨겁게 한다. 하지만 이성은 기본적으로 차가운 속성을 갖는다.” 술과 영화는 정념의 세계를, 책과 물은 이성의 세계를 대변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술과 책은 꽤 상반되는 조합이다. 독서란 기본적으로 중추신경과 뇌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는 활동이다. 한데 술에 들어있는 에탄올은 대표적인 중추신경 억제제다. 과학적인 부분만 따져보면 책은 술보다는 커피, 차처럼 각성효과를 내는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와 궁합이 좋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술과 책이라는 상극의 조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공간들이 생겨났다. 술을 마시며 독서에 빠지는 공간, 말하자면 ‘독서 바(Bar)’다. 책을 읽으면서 술을 마신다니, 범인(凡人)의 상식으로는 낯설기 그지없다. 과연 그 매력이 뭘까. 기묘하지만 흥미로운 독서 바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신당동

소수책방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4동 다산로20길 26 2층

당동은 이제 떡볶이만 먹으러 가는 오래된 동네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여러 디자이너, 화가들의 작업실이 들어서는가 하면 ‘힙’한 카페와 브랜드 매장도 생겨났다. 약수역에서 골목 안쪽으로 10분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소수책방은 신당동을 ‘힙당동’으로 만드는 감각적인 장소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ㄱ자 형태의 넓은 공간은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실내에 보라색, 파란색 조명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주고 테이블마다 양초, 휴대용 조명이 여럿 놓여 있다.




정면 서가는 시, 소설, 에세이와 함께 예술, 철학서가 채우고 있다. 모든 책은 정해진 순서나 규칙이 없이 무작위로 꽂혀있다. 덕분에 각자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에만 몰두하는 ‘편식’에서 벗어나,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왼쪽 공간에 놓인 책장은 판매용이 아닌 책방 주인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다. 물론 이 책들도 손님들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면 무료로 대여도 가능하다.




소수책방을 운영하는 김문 씨의 최근 소설집(왼쪽 위). 평소에는 베일 뒷편(아래)에서 작업에 한창이다.

이곳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책방 주인 김문 씨가 집필활동을 위해 화가, 디자이너 지인들과 함께 마련한 작업실이었다. 작업 도중 ‘주변에 서점도 없는데, 책방을 차려 도매가에 읽을 책을 구해오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사업자 등록을 하니 별 홍보도 안 했건만 알음알음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왔고 지금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실내 곳곳은 그의 개인적인 취미, 취향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전체적으로 창을 가려 어두운 실내는 자신이 가장 집중해서 독서에 몰입하는 환경을 구현한 것이고, 작은 가게에서 원하던 레코드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다른 누군가도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엘피판도 들여놨다. 그렇게 책장 두 개에 테이블 하나가 다였던 공간은 점점 풍성해졌다.




술을 팔게 된 것도 사실 자신이 지인들과 마실 술을 가져다 놓은 데에서 시작했다. 정작 지금에 와선 본인은 글을 쓰는 데 집중하느라 거의 마시지 않고 손님들이 열심히 즐기고 있다. 이날 취재 도중 찾아온 손님들도 다들 책장에서 읽을 책을 고르곤 병맥주 하나씩을 주문해 자리를 잡았다. 이런 걸 두고 이타적 이기주의라 하는 것일까.




다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책방이기에 주류로 이윤을 남기지는 않겠다는 견해다. 따라서 요즘 카페나 음식점에 으레 있기 마련인 ‘1인 1 메뉴 주문 필수’ 같은 규칙도 없다. 그저 지나가다 들러 내키는 대로 쉬다가 가면 그만이다.

책방 입구에 늘어선 그림들. 일부는 김문 씨가, 일부는 작업실을 공유하는 화가 지인이 그렸다고 한다.

소수책방의 인스타그램 소개란에는 ‘망하기 전에 놀러 오세요’라 적혀있다. 책방 주인은 책방이 사양산업임을 부정할 생각도 없고 실제로 매일매일 망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도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듯, 이곳도 망하기 전까지 어떻게 버텨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서 느껴진 긍정적인 기운 때문일까.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놀러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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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ER Corp. /OpenStreetMap


소수책방

서울특별시 중구 다산로20길 26 2층


홍대

책, 익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29마길 10-3



대 거리는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사람으로 붐비는 번화가다. 눈을 돌리면 어디나 최신 음악이 흘러나오는 술집과 식당이 가득하고 버스킹을 하는 공연자들도 많다. 이 홍대 거리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바 겸 책방 책익다 ‘군중 속의 고독’에 빠지고픈 이들을 위한 안식처다.




실내 공간 대부분에 짙은 갈색의 목재를 사용하고 주광색 조명을 두어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책상에는 탁상조명과 필기구들이 놓여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바의 카운터 같기도, 도서관 열람실 같기도 하다.



문학부터 심리, 철학, 예술을 망라하는 책장의 각 칸은 장르가 아닌 사랑, 관계, 불안처럼 공통의 주제를 중심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 칸이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지는 드러내지 않는다. 덕분에 손님은 서점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책을 고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이 우연히 찾은 책은 때로 어떤 베스트셀러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창가를 제외한 모든 벽면을 차지하는 서가에는 몇 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신간, 베스트셀러 등을 눈에 띄게 진열해두지 않으며 수많은 책장 어디에도 자기계발서가 전혀 없다. 이 공간 만큼은 경쟁과 줄 세우기, 외부의 기준에 발맞춰야 하는 현대 사회의 질서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전유겸 대표의 의향에 따른 것이다.



책익다를 운영하는 전유겸 대표(왼쪽)가 추천한 호주 와인 폼비스 런(오른쪽). 신선한 포도향이 강하게 나는 점이 매력적이다.

전유겸 대표는 현재 책, 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는 직장인이다. 팬데믹 기간, 자신을 돌아보던 중 이때가 아니면 자신이 꿈꾸던 공간을 영영 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 이런 걸 보면 ‘언젠가는’의 ‘언제’란 결국 자신이 정하는 법이 아닐까.



손님들의 릴레이 방명록. 두 권이나 되는 내용을 읽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평소에도 자주 책을 읽으며 술을 곁들인다는 그는 음주 독서의 최대 매력으로 ‘몰입’을 꼽았다. 과연 그 말마따나 이날 추천받은 와인 한잔을 마시며 글을 읽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앞서 소개한 소수책방보다 바에 가깝기에 주류 리스트가 꽤 다양하다. 최근 유행하는 하이볼은 물론 맥켈란, 발베니 같은 유명 위스키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맥주와 와인의 종류가 다양해 그날의 기분에 맞는 여러 선택지를 제공한다.





책과 술을 사랑하는 이라면 모두가 만족할만한 이곳의 유일한 아쉬움은 짧은 영업시간 정도다. 평일은 오후 7시, 주말은 오후 3시에 문을 열어 오후 11시면 문을 닫는다. 만남의 시간이 짧기에 오히려 더 소중한 책익다. 어느 날 홍대 거리를 거닐다 문득 떠오를 법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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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익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29마길 10-3 2층


연희동

백색소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38-12 선진하이텔 지하



선 두 공간은 독서에 집중하기 위해 평소에는 앰프의 음악 소리를 제외하면 적막이 감돈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신이 읽은 책이나 마신 술, 주문한 음식에 관한 감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연희동 골목길 지하에 숨은 백색소음은 그런 이들에게 딱 좋은 장소다.




책장과 어우러진 1인석. 분위기가 상당하다.

가게 문을 열면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이 아닐까 착각할 법한 풍경이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실내 중앙에 놓인 커다란 식탁에는 수십 병의 와인과 여러 잔이 가득하고 머리 위에는 미러볼이 돌아가며 잔잔한 빛을 흩뿌린다. 입구 왼편에서부터 ㄱ자로 꺾어지는 벽 전체를 통째로 책장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중간중간 혼자나 둘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만들어 뒀는데 그 모습이 꽤 감성적이다.





작가는 고정되어 있고 신간, 새로운 판본이 나올 때마다 책이 추가된다.

홀에 있는 책장은 전부 소설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때 소설가를 꿈꿨던 사장 호준서 씨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골라 들여놨다. 얼핏 봐도 그 양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대략 600권이 넘는다고 한다. 책방이 아니라 와인바라는 점이 믿기지 않는다.





안쪽에 마련된 독립서가. 규모가 크진 않다

메인 홀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너 개의 테이블과 함께 규모가 좀 작은 서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독립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진열해 뒀다. 앞서 봤던 책장과는 다르게 판매 중인 책들이며 장르도 소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에는 매대 규모가 꽤 컸지만, 책을 사는 손님들이 생각보다 적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장 호준서 씨가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토록 책에 둘러싸인 와인바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여기에는 호준서 씨 자신의 경험이 주요했다. 평소에도 가벼운 독서에 술을 곁들였을 때 특유의 속도감, 정서적인 개방감을 좋아해 종종 바에 책을 들고 갔다. 그런데 홀로 앉아 책을 보다 보면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하게 술과 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금의 백색소음을 열었다.

백색소음은 요리도 훌륭하다. 사진은 대표메뉴인 라구 파스타.

이곳은 오픈 초기부터 근대 유럽의 살롱처럼 술, 책, 음식이 함께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한다. 따라서 앞서 소개한 두 장소가 가진 조용함, 차분함과는 거리가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야말로 백색소음만의 매력이다.





책을 읽다가 술을 마시고 싶어질 수도 있고, 술을 마시다 보면 배가 고플 수도 있다. 책에 빠져있다가도 일행과 대화나 토론을 나누고 싶어지기도 한다. 책과 나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고요한 공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백색소음은 앉은 자리에서 그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유와 로망이 있는 공간이다. 은은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매장을 뒤로하며 나오는 길, 왜인지 혼자든 다른 이와 함께든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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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소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38-12


글, 사진=강유진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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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영 여행+ 기자
content@www.trip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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