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적지 타임라인 여행, 직접 보니 더 뭉클하네

오늘은 제103주년 3.1절이다. 1919년 3월 1일, 일제 지배에 항거해 독립을 선언하며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대규모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했다. 광복 이후 1946년에 국가 경축일로,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 공포로 국경일로 지정됐다. 3.1절의 시작인 3.1 만세운동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국내외 유적지를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출처= Flickr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헌병 무단 통치토지조사사업으로 한반도 경제 사정은 악화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에서 쌀값 폭등으로 쌀 소동이 일어났다. 조선총독부는 해결책으로 조선 쌀을 공출했고, 서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자’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기회라 판단했고, 여운형이 이끌던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 장덕수를 파리에 파견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1919.01.21

덕수궁 함녕전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출처=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1919년 1월 21일,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사망했다. 고종은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된 후, 한일병합 이후 왕으로 격하돼 덕수궁에서 기거했다. 그는 식혜를 마신 뒤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차를 마셨는데, 고통을 호소하다가 오전 6시경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이 독살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고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점이 퍼졌고 민심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보물 제820호 덕수궁 함녕전은 ‘모두가 편안하다’라는 뜻의 ‘주역’ 구절에서 따왔으며, 고종의 침전이다. 대한문에서 우측으로 130m 지점에 있다.


1919.02.08

도쿄 재일본 한국 YMCA 아시아 청소년 센터

東京都千代田区神田猿楽町2丁目5−5

2 Chome-5-5 Sarugakucho, Chiyoda City, Tokyo

출처= 재일본 한국 YMCA 공식 홈페이지

고종 사망 이후 해외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드러났다. 만주에서는 조소앙, 김좌진, 박은식, 김규식, 이승만 등 39명의 독립운동가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일본에서도 유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위한 논의가 진행됐다. 와세다대학 철학부 이광수가 ‘산쇼안’이라는 소바집(2018년 폐업)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치요다구 칸다에 있는 재일본 한국 YMCA 회관에서 6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후 12일, 28일에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도 만세 운동을 펼쳤다. 1923년 YMCA 회관은 관동대지진으로 불탔고 600m 떨어진 지점에 재건했다. 내부에는 2.8 독립선언 박물관이 있다.


1919.02.20

수송공원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7

출처= 네이버 지도 로드뷰

만주 무오독립선언과 2.8 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8 독립선언에 현장에 있었던 송계백은 스승 현상윤을 만나 소식을 전했다. 현상윤은 보성학교 교장 최린,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를 만났고,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기독교, 불교와 함께 독립 운동을 계획했다. 그리고 최린의 제안으로 독립 선언문 만들기로 결정했다. 최남선이 2월 11일 초안을 작성했고, 2월 20일부터 보성학교 안에 있는 인쇄소 ‘보성사’에서 3만 5천 부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보성사가 있던 곳은 현재 조계사 옆에 있는 수송공원이다. 보성학교는 현재의 보성고등학교로 1989년 송파구 오륜동으로 이전했다.


1919.03.01

태화빌딩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

출처= 네이버 지도 로드뷰

원래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2월 28일 손병희 자택에서 민족대표 다수가 회의한 결과, 탑골공원에서의 유혈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했다. 당일 오후 3시, 29명의 민족대표가 모여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4시,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이 독립선언을 했다며 자수했다. 곧이어 일본 경찰들이 민족대표를 모두 연행했다. 태화관 건물은 1919년 5월,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있으며 1층 로비에 민족기념화, 바깥에 기념비와 독립선언서 동판이 있다.


1919.03.01

탑골공원

서울 종로구 종로 99 탑골공원

출처=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한편 탑골공원에 남아있던 민중들은 민족대표가 오질 않아 혼란에 빠졌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가 태화관에서 항의했지만 공원에 가기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이것을 경신학교의 정재용(시인과 다른 동명이인)이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낭독했다. 천여 명의 학생들은 “조선 독립 만세”와 함께 거리 시위에 나섰고 성안과 지방 사람들이 합세해 수십만의 민중들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보신간-남대문, 매일신보사-덕수궁 대한문으로 이동했다. 사적 제354호 탑골공원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종로2가에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현판, 민족대표 중 하나인 손병희 동상이 있다.


1919.04.01

아우내 독립만세 기념공원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아우내장터1길 12-23

출처=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서울 만세운동은 일제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퍼졌다. 천안에서도 홍일선과 김교선이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때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이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상황을 알렸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3월 31일 밤, 봉화 횃불을 올려 거사를 알리고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4월 1일 오후 1시 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000여 명의 군중들이 참여했으나 일제의 진압으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참가자가 부상을 입었다. 천안 병천에 있는 아우내 장터에는 현재 기념공원이 있다. 3.1운동 90주년인 2009년에 준공됐으며 만세운동 기념공원비와 조형물이 있다.


1919.04.11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上海市黄浦区马当路302号-304

Shanghai, Huangpu, Madang Rd, 302号-304

출처= 상하이 여행국 공식 홈페이지

3.1 운동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상하이의 독립 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노선을 구상했다. 4월 10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논의를 시작했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임시정부는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 헌장을 채택한 뒤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후 4월 23일에는 한성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 황푸 마당루에 있는 임시정부 유적지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청사로 활용됐으며 이후 중국 내에서 계속 이전했다. 1989년 상하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요청으로 1993년 복원됐다.


1919.04.15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지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출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공식 페이스북

3.1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일제는 시위 참가자들을 탄압했다.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도 1000여 명이 만세 운동이 펼쳤다. 일제는 검거 작전을 시작했다. 4월 5일에는 수촌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가옥 38호를 불태웠다. 15일, 일본은 ‘만세 운동 사과’를 명분으로 15세 이상 마을 남자를 제암리 감리교회로 모은 후, 교회에 불을 지르고 사격해 23명을 학살했다. 영국 의학자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끌 수 없는 불꽃』을 통해 이 사건을 폭로하며 전 세계로 퍼졌다. 사적 299호 순국 유적지에는 기념관과 묘소, 기념탑이 있다. 일본 기독교계는 속죄의 의미로 1968년 제암교회 재건에 성금을 보냈으며, 2019년 직접 찾아가 사죄했다.

글= 서주훈 여행+ 인턴 기자

감수= 홍지연 여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