팠다 하면 유물! 가을과 겨울 사이 익산은 경주보다 낫네

익산에는 따스한 고독함이 있다. 쓸쓸한 것이 좋은 사람은 없겠지만 아주 가끔, 특히 지금 같은 늦가을이면 혼자 고독을 즐기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맨 처음 생각나는 건 전북 익산.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 속절없는 시간이 야속할 때 익산으로 떠나고픈 이유는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이 두 풍경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땅 아래 묻힌 이야기가 더 무궁무진한 이곳에서는 1000년 시간쯤 우습게 넘나든다.

미륵사지

1000년의 시간을 깨우는 망치 소리

2019년 4월, 장장 20년에 걸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작업이 끝났다. 탑을 지탱하던 흉물스러운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새단장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1998년 4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해체·보수가 결정 났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복원중’이라고 봤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미륵사지 석탑은 계속 ‘복원중’이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단일 문화재 복원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것으로 기록됐다.

미륵사지, 미륵사가 있던 땅이다.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의 남편 무왕이 지은 절이라고 나온다. 절터 뒤로 보이는 산은 미륵산인데, 옛날엔 용화산이라고 불렸다.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 중턱 사자사라는 암자로 가는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만났고 선화공주는 왕에게 산 아래 보이는 터에 절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미륵사는 세계 유일 3탑 3금당으로 지어진 절이다. 약 7세기에 지어져 1587년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석탑 사이에 목탑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다. 목탑과 동쪽 석탑은 언제 소실됐는지 기록조차 없다. 1915년 일본은 서쪽 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로 탑을 발라버렸다. 탑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 양은 185톤에 달했다.

동탑은 ‘미륵사지 9층 석탑’이라고도 불리지만 서쪽 탑은 그저 미륵사지 석탑이다. 최근 작업이 끝난 왼쪽 탑은 6층까지만 복원됐고 그마저도 사방 면이 전부 달라 마치 미완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이름에 몇 층인지를 넣지 않고 석탑이라고만 부른다. 복원 기간이 20년이나 되는 석탑은 왜 끝내 미완으로 남았을까.

1992년 당시 정부는 동쪽 석탑의 복원을 추진했다.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문헌이나 그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효율성만 따져 2년 만에 졸속으로 탑을 완성시켰다. 국내 문화재 복원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서탑을 복원하면서 ‘추정에 의한 복원은 하지 않겠다’를 원칙으로 세웠다. 자료를 살피고 또 살폈지만 탑의 층수에 대한 언급은 어떤 문헌에도 없었다. 해서 내린 결론이 현재 남아있는 모습까지만 복원하자는 거였다. 탑에 대한 정보가 실린 역사적 근거가 발견되면 그때 탑을 복원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다.

미륵사지에서는 지금도 발굴이 한창이다. 땅속에 묻힌 역사를 끄집어내고 숨을 불어 넣는다. 1000년 넘는 세월을 다루는 일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다. 커다란 바위를 덮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솔 모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정성스레 문질러 닦는다. 돌마다 번호를 붙이고 위치를 확인한다. 가을 오후 햇살에 멀리 미륵산이 멍해지고 섬세한 망치질 소리만 들린다. 1000년의 시간을 깨우는 소리다. 가는 계절, 가는 시간을 귀로 눈으로 지켜본다.

옛날 돌과 새 부재를 이어붙여 불규칙하게 금이 가고 얼룩덜룩한 서쪽 탑은 사면 모습이 전부 다르다. 한쪽 면이 사선으로 칼로 베어진 것 같다. 미륵사지에서 사라져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는 건 바로 이 모습 때문이다. 거센 바람에 한쪽으로 몸이 쏠려버린 것 같은 서쪽 탑에는 1000년의 시간이 담겼다. 1000년 동안 이곳을 훑고 지나간 바람이 정지해 있다. 한쪽 면이 날아간 서쪽 탑을 바라보면 백 년 못 사는 인생이 갑자기 덧없어진다. 그러다가 망치 소리에 정신이 들어 금방 생각을 고쳐먹는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힘을 얻고 돌아간다. 마음이 쓸쓸해질 때 미륵사지를 찾는 이유다.

서동축제와 왕궁리유적

익산 사람들의 자부심 서동

서동축제가 진행되는 서동공원 풍경

익산의 웬만한 명소 대부분 한사람과 연결이 된다. 백제 30대왕 무왕이다. 무왕은 드라마로도 나왔던 ‘서동요’의 주인공이다. 어려서 마를 팔던 평범한 사람이 신라 공주와 결혼을 하고 백제의 왕이 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익산 땅에 길이길이 전해져 내려온다. 익산 사람들의 서동 사랑은 봄에 절정을 맞는다. 익산 사람들은 서동을 주제로 온갖 문화행사를 준비해 5월 한 달 동안 ‘서동 축제’를 여는데, 지난해는 코로나 여파로 미루다가 12월에, 올해는 11월 6일부터 28일까지 진행한다.

서동축제는 익산의 대표 축제다. 1969년부터 시작된 축제로 마한민속예술제라고 부르다가 2006년부터 서동제로 이름을 바꿨다. 서동요를 기반으로 한 서동제의 핵심은 경주시와의 콜라보다. 경주로 사절단을 보내고 손님들을 모셔서 환영 만찬을 한다. 옛날 혼인날 신랑 쪽 사람들이 신부 집으로 가 신부를 데리고 오던 풍습에서 착안한 이벤트인데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못 하고 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낮에 진행되지만 저녁 시간에도 방문객이 끊이질 않는다. 바로 유등 때문이다. 서동축제에 유등이 전시된 건 2019년부터다. 공주시에서 등을 빌려다 전시를 시작했다. 2020년부터는 자체 제작한 유등을 선보이고 있다. 서동의 탄생부터 왕에 오르기까지 연대기를 등으로 표현했다.

쌍릉

익산토성

왕궁리유적은 익산 사람들의 자부심을 가득 담고 있다. 무왕 때 조성된 궁터로 추정되는 왕궁리유적은 미륵사지와 함께 2015년 7월 백제 역사 유적지구로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이로써 익산은 고도(古都)의 조건(왕궁: 왕궁리유적, 왕릉: 쌍릉, 국가 사찰: 미륵사지, 왕궁을 방어하는 산성: 익산토성 등 13개의 산성)을 모두 충족하게 됐다. 4대 고도는 경주·공주·부여 그리고 익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궁’이라는 지명을 쓰는 곳이 바로 여기예요. 조선시대부터 왕궁 지명을 사용했습니다.

박인옥 익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왕궁리유적은 그 규모가 확실하게 확인된다. 동서 240m, 남북으로 490m로 궁궐의 성벽 흔적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5층 석탑 앞이 정전(正殿: 왕이 조회를 하던 궁전) 터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수부(머리 수首, 관청 부部)’라고 적힌 기와가 나왔다.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 있던 돌조각이었지만 익산 사람들에게 이 발견은 의미가 남달랐다. 익산이 고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기와

왕궁리유적은 구릉지대에 있다.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공간을 분할 구성했다. 성안에 물을 모으고 저장한 수로시설과 삼국시대 최초 화장실 흔적도 고스란히 남이 있다. 화장실 유적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처음 발견했을 땐 그저 창고겠거니 했다. 발굴단 중에 일본 사람이 있었는데, 후쿠오카 고로카 유적에서 많이 봤다며 혹시 화장실이 아닐까 의견을 냈다. 당장 토양 조사에 들어갔고 주변 흙에서 기생충과 회충들이 나오면서 화장실임이 밝혀졌다.

왕궁리유적은 현재도 발굴 조사 중이다. 왕궁터라는 사실은 학계도 인정했지만 어떤 왕이 살았는지는 학자마다 의견 차이가 있다. 무왕은 7세기 사람인데 6세기 중국 청화 유적이 출토된 것도 아직 설명해내지 못했다. 왕궁으로서 수명이 다한 후엔 절이 들어섰을 거라고 추정한다.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절 구조를 하고 있는데, 1965년 탑 해체 보수를 했을 때 금강경판과 사리함도 나왔다. 왕궁리 5층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사리 외함과 99% 흡사하다.

왕궁리유적 주변은 전부 전답이다. 발굴 전 이곳 역시 그랬다. 중간에 탑만 우뚝 솟아있었다고 했다. 왕궁 가장 높은 곳에 오르자 남쪽으로는 김제 모악산이 북쪽으로 미륵산이 보인다. 축구장 10개 규모로 폭 3m 높이 6m의 담장으로 둘러쳐진 이 안에 건물만 36개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이곳의 주인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익산 사람들은 무왕이 이곳에서 백제 부흥을 꿈꿨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지금 혹시 가을 타는 당신, 혼자 조용히 사색할 곳이 필요하다면 더 늦기 전에 익산에 가보자. 모든 것이 화려하고 빽빽하게 들어찬 신라의 경주와는 달리 백제의 익산은 비워진 공간이 훨씬 더 많다. 여백은 마치 시간이라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묘한 거리감으로 여행자를 기억과 추억을 환기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분위기는 가을에 가장 증폭된다.

홍지연 여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