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한 통으로 떠나는 여행] 브뤼헤 그 골목길을 돌아 ‘성 요한 병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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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뜬금없이 도착한 이메일 한 통이 눈길을 끌었다.

    ‘1월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한 팁 : 브뤼헤와 주변을 경험하세요’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발신인은 브뤼헤 관광청. 그들, 벨기에 사람들에게 1월은 행복한 달이 아닌가 보다. 이 ‘어두운 달(dark month)’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유혹의 손짓을 한다. 세계 문화유산의 도시, 햇빛, 공정무역 초콜릿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몇 해전 벨기에 플랜더스(혹은 플랑드르)에 다녀왔는데, 그때 인연으로 도착한 이메일이었다.

    메일은 어떤 전시회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 시국에 전시회를 와서 보라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그냥 기계적으로 발송된 메일인 듯했다. 평소 같으면 환경을 위해 휴지통으로 직행했을 메일이건만, 선뜻 마우스에 손이 가질 않았다. 개인적 메일도 아니고 다량 발신하는 홍보성 메일일 뿐이었는데. 브뤼헤라는 도시가 그걸 막고 있었다.


    브뤼헤는 벨기에 북부에 있는 참 아름다운 도시다. 뾰족한 종탑과 적당한 크기의 광장, 구불구불 이어지는 운하, 가지런한 성벽과 돌길이 여행자를 중세 유럽으로 안내한다. 도시는 크지 않지만 시 전체가 유네스코 선정 세계 문화유산일 정도로 풍성한 스토리와 볼거리로 가득 차 있다.

    슈거 파우더가 잔뜩 뿌려진 와플을 들고 마르크트 광장을 거닐다 닿는 곳이 ‘성 요한 병원(Sint Janshospitaal)’이다. 12세기 중반까지 순례자, 여행자,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봐주었던 유럽 최고(最古) 병원 중 하나였다. 지금은 박물관 겸 미술관으로 바뀌었는데, 여전히 ‘병원’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중세 시대 병동, 의료기기 등을 비롯해 교회, 예배당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브뤼헤는 운하가 많아서 서유럽의 베니스로 불린다. <사진=브뤼헤 관광청>

    하지만 성 요한 병원을 가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브뤼헤의 황금기, 그러니까 15세기 무렵 유럽 미술계를 주도했던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 작품을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스 멤링은 벨기에가 자랑하는 대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와 함께 현대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른바 ‘플랑드르 화파’를 형성했던 인물이다.

    멤링은 당시 브뤼헤 부자들을 위해 정교하고 화려한 초상화와 제단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의 기법과 색감, 공간 구성 등은 현대 미술가들도 따라 할 정도로 존재감이 크다. 브뤼헤 관광청이 내게 보낸 메일에 “현대 예술가들이 한스 멤링으로부터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2021년 2월 28일까지 성 요한 병원에서 열리는 ‘Memling Now’ 전시회를 방문하라”라고 적은 이유다.

    한스 멤링의 대표작 ‘성 요한 세 폭 제단화(1479년 작)’ <사진=브뤼헤 관광청>

    멤링이 활약하던 시기 브뤼헤는 브뤼셀, 겐트 등 플랜더스 지역 다른 도시들과 함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유럽의 돈이 다 이곳으로 몰렸다. 부유해지고 여유가 생기니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부자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줄 화가를 찾았다. 이들은 실력 있는 화가를 후원하거나 돈을 내고 그림을 의뢰하기도 했다. 좋은 그림은 교회에 기증했다. 미술이 돈벌이가 되자 전문 화가 밑에서 도제 형태로 그림을 배우는 공방들이 생겨났고 유명 화가들을 후원하는 가문도 많아졌다.

    15~17세기 플랜더스는 부를 바탕으로 미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은 독특한 화풍으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영역을 남기는데, 이들이 바로 ‘플랑드르 화파’다.

    성 요한 병원 전경. <사진=브뤼헤 관광청>

    플랑드르 화파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주목을 끌었다. 미술사에서는 특히 유화를 등장시킨 화파로 유명하다. 당시 그림은 계란과 아교를 이용한 템페라화가 일반적이었는데, 건조 시간이 너무 빨라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반면 유화는 천천히 마르기 때문에 화가 입장에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세밀하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다.

    이 유화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이가 바로 플랑드르 화파의 거장 반 얀 에이크다. 그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는 정밀한 유화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1434년작) <사진=wikipedia>

    플랑드르 화파 그림은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적 우화와 상징을 다룬 내용이 많았는데, 16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인해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 몇 가지를 예로 들면, 혹시 만화 ‘플란다스의 개’를 알고 있는지? 주인공 네로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을 보면서 애견 파트라슈와 함께 쓸쓸히 숨을 거두는데, 그 그림이 플랑드르 화파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다. (사실 ‘플란다스의 개’는 배경만 벨기에 플랜더스일 뿐, 벨기에와 직접적인 관련은 아무것도 없다. 원작은 ‘위다’라는 필명을 가진 영국 작가 작품이고 만화 영화는 1975년 후지TV에서 방송된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최근에는 BTS 방탄소년단이 플랑드르 화파 그림을 소개해 화제가 됐다. BTS의 ‘피 땀 눈물’ 공식 뮤직비디오를 보면 초반에 멤버 ‘진’이 무엇엔가 홀린 듯 보는 그림이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플랑드르 화파 거장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반역 천사의 추락’이란 작품이다.

    방탄소년단 ‘진’이 보고 있는 그림이 브뤼헐의 걸작 ‘반역 천사의 추락’이다. <사진=유튜브 캡처>

    15세기 플랑드르 화파를 특히 ‘초기 플랑드르(Flanders Primitives)‘라고 부른다. 멤링은 초기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화가로, 종교적 주제를 화려한 색채와 특유의 세밀하고 사실적 표현으로 당시 부유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브뤼헤에서 활동하던 시기 브뤼헤 대성당, 성 요한 병원 후원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특히 성 요한 병원을 위해 여러 개의 제단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들 모두 초기 플랑드르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브뤼헤가 1월 10일부터 2월 말일까지 멤링이 그린 제단화를 봉헌하고 평소 그와 교류가 많았던 성 요한 병원에서 ‘Memling Now’전을 개최하는 배경인 거 같다.

    브뤼헤 야경 <사진=브뤼헤 관광청>

    이번 전시회에는 세계적 개념 예술가인 미국의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초상화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 화가인 케힌드 와일리(Kehinde Wiley, 오바마 전 대통령 공식 초상화를 그렸다.), 시리아계 미국인 예술가 다이애나 알 하디드(Diana Al-Hadid) 작품들도 전시된다.

    ‘1월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한 팁 : 브뤼헤와 주변을 경험하세요’라는 제목의 메일은 이 전시회를 알리기 위해 코로나19 와중에 지구 건너편에 살고 있는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비록 가볼 수 없어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온라인 가이드라도 한번 둘러보면 어떨까.

    최용성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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