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어요” 태안에서 찾은 나만 아는 프라이빗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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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성공률을 높이는 초간단 팁이 있다. 내려놓기다. 기대감을 낮추고 무심한 듯 떠난다. 태안 여행이 그랬다. 사실 태안은 어중간하다. 한반도에서 바다 여행지를 고르자면 서해가 가장 후 순위로 밀린다. 물빛은 동해가 제일이고 경치라면 보석 같은 섬이 알알이 박힌 남해가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태안을 꼭 한번 가보시라 추천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은근한 갯마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망’과 ‘위로’라는 단어가 보인다. 힌트를 주자면, 기억을 더듬어 2007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가 볼 거다. 대한민국의 모든 눈과 손이 태안 앞바다로 쏠렸던 그때의 이야기를 되새겨볼 참이다.

    웬 켜켜이 묵은 과거 이야기?

    ‘뒤로가기’ 버튼 누르는 거 잠깐 멈추고, 그럼 이건 어떤지? 네이버, 다음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비밀스런 태안 해변을 소개한다면!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몽산포·꽃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서해 대표 해수욕장에서 살포시 빗겨 한적한 해변을 애써 찾아갔다. 천혜의 절경보다 고즈넉한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다만 불편할 수 있다. 차로는 접근이 불가능해 오롯이 두 발로 걸어서만 갈 수 있고 햇볕 가려주는 파라솔은커녕 생수 파는 매점 하나 없다.

    상처를 딛고 일어난 태안 바다

    매년 여름이면 서해에서 가장 사람이 몰린다는 태안. 태안반도와 안면도로 구성된 태안은 해수욕장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청에서 입장객 수를 집계하는 대규모 해수욕장만 28개, 그 사이사이 촘촘하게 소규모 해변들이 깨알같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는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기존에 육지였던 곳에 물이 차면서 형성된 해안으로 해안선이 무척 복잡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톱니바퀴처럼 바다와 땅이 물고 물리는 형국인데, 바다가 훅 들어온 만마다 앙증맞은 해변이 위치한다. 해안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모습을 바꾼다. 몽돌도 있고 고운 모래사장 해변도 있다. 억척스러운 갯바위도 깎아지르는 해안절벽까지 태안 해변의 얼굴은 각양각색이다.

    태안에서 희망을 보고 위로를 받는 연유는 10여 년 전 사건 때문이다. 2007년 12월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와 삼성중공업 해상 크레인이 충돌해 원유 약 8만 배럴이 태안 해역에 유출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태안반도 남단 내파수도에서 북단 가로림만에 이르는 해안선 167㎞가 온통 기름으로 범벅이 됐고, 태안과 서산 11개 읍·면 5159ha의 양식장이 피해를 봤다.

    2007년 유조선 원유 유출 사건 당시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출처: 매일경제신문]

    당시 전문가들은 생태계가 회복되려면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까지 걸린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겠다며 전국에서 몰려들었고 성금은 물론 기름 떼를 지우는 데 쓰라며 옷가지들을 보내왔다. 하루 최고 5만 명, 123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를 포함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힘을 모은 결과 태안의 생태계가 빠르게 되살아났다. 2008년 국토해양부 조사에 따르면 기름기 농도가 기준치 이하로 낮아졌고 대부분 지역에서 사고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2012년 사고 발생 5년 만에 생태계 90%가 회복된 것으로 평가됐다.

    살면서 가끔 기적을 보는 경우가 있다. 태안의 일도 기억에 선하다. 버스를 빌려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성금을 내거나 못 쓰는 옷과 천을 모아 태안으로 보냈다. 자원봉사자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마을 어귀부터 길게 줄을 섰다. IMF 외환위기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또다시 합심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IMF 금 모으기 운동은 기록 사진 속에나 존재하는 기억이지만 태안의 기적은 현장에 가볼 수 있다. 2012년 소원면 의항리에 조성된 ‘태배길(6.5㎞)’은 당시 자원봉사자들이 오갔던 방제길을 정비해 만든 산책길이다.

    지도에도 없는 비밀스런 해변

    10여 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사건 현장이었던 소원면 의항리로 향했다. 의항리는 당시 뉴스에 단골로 등장했던 곳이다. 잘나가는 국회의원도 재벌 총수도 산간벽지 초등학교 동창모임과 낚시동호회 회원들… 출신도 신분도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을 살리고자 이곳에 모였다.

    의항리는 사고지점과 가장 가까운 마을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들의 방제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얀 방제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은 아슬아슬한 해안절벽을 따라 놓인 임시 철계단을 타고 큰재산 일대 해변으로 갔다. 태안반도에서 서북쪽으로 툭 튀어나온 큰재산은 동쪽부터 신너루·안태배·구름포·의항해변 등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사고 당시 수평선까지 검은 기름이 가득 덮었다고 했다. 파도에 밀려온 원유 덩어리는 추운 날씨에 묵직한 젤 형태로 굳어졌고 갯바위며 모래사장이며 온갖 것을 다 덮어버렸다. 자원봉사자들은 갯바위에 쪼그려 앉아 수건으로 기름 떼묻은 돌과 자갈을 손수 닦아냈다.

    의항해변

    태배길은 의항해변에서 시작해 태배전망대~신너루 해변~의항항을 지나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순환길로 짧지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적한 포구마을, 해안절벽 숨겨진 비밀의 숲, 물때에 따라 길이 열렸다 사라지는 갯바위, 간판도 없는 솔숲 캠핑장 등 지루할 틈이 없다. 의항해변부터 큰재산 입구까지는 임도를 따라 걸었다. 다행히 오가는 차가 없어 한적하게 걸을 수 있었다. 2007년 자원봉사자들이 걸었던 바로 그 구간이다.

    태배길은 태안해변길과 일부 구간 겹친다.

    구름포 해수욕장 갈림길에서 길은 큰재산 정상부로 향했다. 약 2㎞ 오르막 구간이다. 등줄기에 땀이 차고 종아리가 땡땡해지기 시작할 때쯤 태배전망대에 도착했다. 이날은 운이 좋았다. 신두리 해변과 서해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태배전망대에서 본 바다는 지금까지 본 서해 모습 중에 가장 물빛이 파랬다.

    태배전망대에선 잠시 헤맸다. 해안쪽으로 가는 길과 마을로 곧장 내려가는 길로 갈린다. 태배길은 해안데크라고 적힌 표지판을 찾아 따라가면 된다. 처음엔 이 길이 맞나 싶었다. 풀이 많이 자라 길의 흔적을 드문드문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5분쯤 걷자 시야가 트이기 시작하고 푸른 바다가 모습을 보였다.

    태배전망대 근처 오솔길에서 내려다본 안태배해변과 신너루해변

    오솔길을 빠져나온 길은 안태배해변으로 이어졌다. 한쪽은 산으로 다른 한쪽으로는 절벽으로 가로막힌 안태배해변은 이번 태안 여행에서 발견한 보물이다. 무엇보다 비밀스러워서 좋았다. 안태배해변으로 가려면 오로지 걷는 수밖에 없다. 길게는 10분 짧게는 5분이라도 걸어야만 한다. 10분이 걸리는 길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전망대부터 걷는 거고(태배전망대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다. 구름포 해수욕장 갈림길부터 오프로드 같은 산길이 펼쳐져서 4륜 구동차가 아닌 일반 승용차는 불가능하다) 더 짧은 길은 해안절벽 반대편에 위치한 신너루해변에서 가는 방법이다. 물때가 맞으면 갯바위를 건너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절벽 위로 난 우회로를 통해야 한다.

    안태배해변

    안태배해변

    신너루해변

    안태배해변과 해안절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너루해변을 지나면 다시 마을길 임도다. 안태배해변과 신너루해변은 지도에 검색되지 않는 정말 작은 해변이다. 신너루해변엔 캠핑장이 있어 이용객들이 알음알음 찾아오지만 안태배해변은 정말 사람이 없었다. 100m 남짓한 해변에 사람은 중년 부부 한 쌍뿐이었다. 짐이라고는 책 한 권, 단출한 차림을 보니 현지인 같았다.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운 그들은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곧 나른한 낮잠에 빠졌다. 우거진 풀숲을 길을 잃은 듯 빠져 나와 만난 비밀 같은 안태배해변은 풍경도 분위기도 몽환적이었다.

    여름 신두리는 바다보다 파랗다

    태배길을 걷고 난 다음 향한 곳은 신두리 해안사구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안사구다. 해안사구는 해안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모래언덕을 말한다. 해변을 따라 펼쳐진 사구의 전체 길이는 약 3.5㎞이고, 이중 천연기념물 제 431호로 지정된 해안사구 구역은 길이 1.5㎞, 폭은 1.3㎞에 달한다. 계절과 각도만 잘 맞추면 해외 어느 사막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믿을 정도의 풍경을 보여준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정해진 탐방로를 통해서만 둘러볼 수 있다. 코스는 모두 A·B·C 세 가지. A코스는 사구센터에서 시작해 모래언덕~순비기언덕을 통과해 탐방로 출입구로 나오는 길이 1.2㎞의 탐방로다. B코스(2㎞)는 사구센터~모래언덕~초종용군락지~고라니동산~순비기언덕~탐방로 출입구를 차례로 지나고 마지막 C코스(4㎞)는 B코스와 동일한 길로 고라니동산까지 간 다음 골솜생태숲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별똥재~억새골~해당화동산~순비기언덕을 통과해 탐방로 출입구로 가는 길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다. 뜨거운 여름 태양이 정수리를 찌른다. 탐방에 앞서 사구센터에 들러 사구 형성과정에 대해 간단히 공부하고 지도를 챙겨 나왔다. 6~7년 전 겨울에 들렀던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그간 어찌 변했을까 설레기도 했다. 신두리 해안사구 표지석을 지나자 데크로드가 시작됐다. 곧장 흰 벽 같은 모래언덕이 보이는데, 그곳을 제외하고는 온통 초록이었다. SNS에서 본 건 이렇지 않았는데, 6~7년 전 기억 속 해안사구 역시 황량함 뿐이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의혹은 사구센터에서 풀렸다. 사진 보정을 과하게 한 것도 내 기억이 조작된 것도 아니었다. 계절 탓이었다. 해안사구는 형성 단계에 따라 1차 사구와 2차 사구로 나뉜다. 1차 사구는 육지에서 바다로 들어온 모래가 파도에 밀려 다시 해안가에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이곳에 사구 식물이 서식하면서 안정화 과정을 거쳐 2차 사구가 된다. 1차 사구 표면엔 식물이 없고 고운 모래만 있다. 2차 사구는 모래언덕이라기보다 풀이 우거진 초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갯그령·순비기나무·통보리사초·억새·해당화 같은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난다.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여름에 가면 사막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모래언덕이 형성된 일부 구간 빼놓고는 풀이 무성한 들판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초록 식물은 해안사구를 띠처럼 둘러싼 바다보다 훨씬 푸르게 빛났다.

    신두리 해안사구센터

    홍지연 여행+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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