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핫한 문화재라니…주말 예약은 한 달 전에도 어림 없다는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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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요즘처럼, (반강제적이긴 하지만) 집과 가깝게 지냈던 적이 또 있나 싶다. 몹쓸 전염병이 가져다준 순기능이 있다면 전엔 너무 사소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거다. ‘집의 존재’도 그렇다.


    100년 묵은 집이 품은 숙명

    쐐기를 박은 건 최근 방문한 ‘딜쿠샤’였다. 97년 전에 지어진 옛집은 어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개인적인 공간인 동시에 역사적 흔적과 당시 사회상을 간직한 공적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 누구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외국인 손에 탄생해 조선의 광복을 지켜봤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은신처가 되어줬으며 정치인이 사들였다가 다시 정부 소유가 된 딜쿠샤의 얄궂은 운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 근현대의 맥이 잡힌다. (희한하게도 딜쿠샤의 소유자 혹은 거주민이 바뀔 때마다 대한민국 사회엔 꼭 일이 터졌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주말 관람 예약은 한 달 전에 이미 다 차버려요.

    코로나 시국 딜쿠샤는 조용하게 흥행 중이다.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드라마틱한 운명을 견딘 딜쿠샤에 관심과 애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가보다. 어떻게 하면 딜쿠샤를 좀 더 의미 있게 소개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의 저자 최지혜 교수에게 연락을 드렸다. 최지혜 교수는 2018년 12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진행된 딜쿠샤 복원 프로젝트에서 실내 재현을 맡았고 그 경험을 상세하게 책에 담아냈다. 책을 주문해 정독한 후 6월 10일 최지혜 교수와 함께 딜쿠샤를 찾았다.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와 책 내용을 적당히 버무려 딜쿠샤 방문 후기를 적어본다.


    외국인 부부의 로맨틱한 신혼집

    딜쿠샤의 주인은 일제강점기 경성(당시 서울의 이름)에 살던 외국인 부부,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였다. 탄광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조선 땅을 찾은 앨버트는 출장차 갔던 일본에서 메리를 만나 결혼식을 치르고 경성에 신혼집을 마련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다.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한다. 1923년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뒤에 집이 완성됐다.

    테일러 거주 당시 딜쿠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앨버트는 ‘테일러 상회’를 운영하며 일종의 무역업을 했다. 수입해온 자동차와 잡동사니를 조선 사람에게 팔고 고가구나 병풍, 호랑이 가죽 등 다양한 조선 제품을 해외로 수출했다. 앨버트는 사업가인 동시에 미국연합통신사의 해외통신원이었다. 이국의 사업가 부부는 조선이 처한 역사적 현실을 묵과하지 않았다. 앨버트는 일본의 만행을 기사로 작성해 서구권에 소상하게 알렸다.


    100년 전으로 떠난 ‘딜쿠샤’ 집들이

    6월 10일은 무척 더웠다. 낮 기온이 30도를 넘어서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하철 독립문역에 내려 도보로 가는 방법을 검색했다. 3번 출구에서 딜쿠샤까지 직선거리로는 얼마 안 돼 보이는데, 횡단보도를 3번이나 건너라고 한다. 의심을 거두고 지도가 하라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현재 독립문역에서 딜쿠샤로 가는 유일한 통로는 사직터널 위로 난 언덕을 지나는 것밖에는 없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더운데 언덕을 오르려니까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현재 딜쿠샤 앞은 공사중이다. 안내소를 새로 짓고 그 앞으로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이 뚫리면 사직터널 위로 우회하지 않아도 된다.)

    관람 예약은 오후 3시로 했다. 딜쿠샤 관람은 1일 4회 진행된다. 1회당 최대 10명까지만 들여 보내준다. 예약은 필수다. 인터넷 예약과 현장접수,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당일 취소분에 한 해 진행하는 현장접수는 거의 불가능하다. 필자도 방문 10일 전에 겨우 예약했다.


    외국인이 집을 짓자 저주가 내렸다

    사직터널 언덕을 다 오르자 공영주차장이 보인다. 차를 가지고 오면 이곳에 주차하면 되겠다.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자 어마어마한 은행나무가 맞아준다. 전국을 다니며 보호수를 여럿 봤지만 이렇게 큰 건 처음이다. 마치 시멘트 화분에 꽂힌 은행나무 다발 같다. 한쪽 면은 집 담벼락과 맞닿아있고 나무 둘레와 거의 인접하게 시멘트를 발라 경계를 만들었다. 어떻게든 나무를 해치지 않고 개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다.

    딜쿠샤가 위치한 ‘행촌동’의 지명이 바로 이 나무에서 왔고 외국인 부부가 신혼집으로 이 터를 점찍은 것도 거대한 은행나무가 품은 풍경 때문이었다. 심상치 않은 은행나무의 풍채에 압도당해 잠시 멍해졌다. 나뭇가지가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눈으로 따라가느라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노려본 탓이다.

    어느 날 메리는 한양 도성을 산책하다

    사직단을 한쪽으로 두고 아래로는 독립문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오르게 된다.

    그곳에는 크고 멋진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중략)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 중에서

    숨을 고르고 그 옛날 메리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주변 건물들을 지우자 나무가 더 육중하다. 이방인의 눈엔 ‘멋지게’만 보였을지 모르는 이곳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신성한 장소였다. 은행나무에 대고 소원을 빌었고, 주변에서 샘에서 부족함 없이 물을 구할 수 있었다.

    딜쿠샤로 가는 길 담벼락 위로 육중한 은행나무의 모습이 먼저 보인다.

    외국인이 이곳에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발이 심했다. 무당이 나타나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집이 완성되자 기묘한 일들이 생겼다. 이사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날 은행나무의 가지 하나가 부러지면서 그 아래 있던 메리의 동생을 덮쳤다. 다행히 피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말라리아 병세가 더 심해진 메리의 동생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6년 벼락을 맞아 불이 나면서 2층 전부와 1층 반 이상이 피해를 입었고 집 관리인이 갑자기 죽음을 맞기도 했다.


    선망의 대상이자 꿈의 집

    은행나무를 구경하면서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3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직원이 관람객을 불러 모은다. 신발장에 신발을 맡기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직원 안내에 따라 QR코드를 찍고 체온을 잰 다음 자유 관람하면 된다.

    현재 출입구는 건물 측면으로 난 문이다. 본래 정문은 테라스로 연결되는 계단 앞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 출입문으로 들어와 만나는 초입 공간이 아마 1층 주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현된 거실 공간 양옆으로 전시관이 마련됐다.

    왼쪽 사진: 원래 정문 역할을 했던 테라스 쪽 출입구 / 오른쪽 사진: 복원 후 1층 거실

    딜쿠샤는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로 총면적 624㎡(188평)다. 집이 지어질 당시 앨버트가 사들인 전체 부지는 1만평 정도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대저택이었다. 규모뿐만 아니었다. 딜쿠샤는 당시 일반인들에겐 선망의 대상인 ‘문화주택의 시작’으로 꼽힌다.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문화주택은 서양식 외관을 갖춘 구조를 갖춘 주택을 말한다.

    소달구지와 지게에 자재를 실어 날러 집을 완성했다. ‘참나무 목재 계단은 유럽 스타일 궁전에서 철거한 것을 가져와 썼다’고 책에 적었다. ‘당시 일본이 덕수궁 공원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돈덕전 등 궁궐 안의 여러 전각이 헐렸는데 딜쿠샤의 계단도 이때 헐린 전각의 일부인 것 같다’고 최 교수는 설명한다. 현재의 계단은 재현한 것이다.


    주인은 떠나고 혼란만 남았다

    1924년 집이 완성되고 앨버트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메리 역시 이듬해에 남편을 찾아 미국 갔다. 부부가 본격적으로 이 집에 살게 된 건 1930년 무렵부터다. 딜쿠샤 안에는 동서양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무역업을 하던 앨버트와 메리는 서양식 가구와 조선의 골동품을 적절히 섞어 살림집을 꾸몄다. 테일러 부부가 일본에 의해 추방당한 것은 1942년 일이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해 기사를 쓴 앨버트는 일찌감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광복 이후 앨버트는 딜쿠샤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다. 미군정 통역사로 지원해 한국 파견을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앨버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메리는 남편의 유해를 들고 한국을 찾았고 앨버트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혔다. 앨버트가 죽고 난 후 앨버트의 동생 윌리엄이 딜쿠샤를 관리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난민들이 딜쿠샤에 들어와 살았다. 그러다 1959년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조경규가 딜쿠샤를 사들인다.

    왼쪽 사진: 2009년 딜쿠샤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오른쪽 사진: 2016년 딜쿠샤 모습 [서울시 제공]

    1963년엔 정부 소유가 된다. 드디어 딜쿠샤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받은 건가 싶지만 전혀 아니었다. 1963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당시 정부는 부정 재산 축재를 이유로 딜쿠샤를 압수해버렸다. 소유만 했을 뿐 당시 정부는 딜쿠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몇 년간 비어있던 건물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2016년엔 12가구, 23명이 살기도 했다. 주인은 정부인데 대체 누구와 임대차 계약을 맺은 걸까. 201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고 난 이후에도 이주하지 않은 한 남성은 ‘부동산 계약을 통해 입주했다며 무단점유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주가 마무리된 건 2018년 일이다.

    사실, 그 어떤 정권도 딜쿠샤에 관심이 없었다. 딜쿠샤의 존재가 다시 알려진 건 2005년 일이다.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의 부탁으로 김익상 서일대 교수가 수소문 끝에 ‘딜쿠샤’를 찾아냈다. 그렇게 역사 속에 묻힌 줄만 알았던 딜쿠샤가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됐다.


    흑백사진과 함께 찾아온 프로젝트

    재현의 대상은 늘 이렇게 흑백사진과 함께 찾아온다.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 중에서

    2016년 서울시는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와 함께 딜쿠샤 복원을 위한 업무협약 체결을 맺었다. 같은 해 3월 테일러 부부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가 딜쿠샤 관련 자료 1026건을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1층 거실의 예전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2018년 11월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학예사가 흑백사진을 들고 저를 찾아왔어요.

    본격적인 복원은 2018년 말부터 시작됐다. 석조전(2012~2014년), 워싱턴D.C. 주미대한제국공사관(2016~2018년) 복원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명성이 쌓였고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최지혜 교수를 ‘근대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래 딜쿠샤의 구조는 간단했다. 1층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거실과 방, 주방이 2층에도 거실과 응접실이 있었다. 그랬던 집이 주인이 바뀌고 여러 세입자들이 살면서 1층에만 방 13개, 창고 7개, 주방 및 다용도실, 화장실 7개로 구조가 바뀌었다. 2층 역시 방 12개, 주방, 화장실, 창고가 각각 2개씩으로 늘어났다.

    가벽이 있었어요.

    공간을 편의에 맞춰 잘게잘게 나눈 거죠.

    원룸처럼 쓰고 계셨던 거예요.

    정부랑 협상 끝나고 원래 도면대로 헐고 공사를 시작했죠.

    2층 거실 예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메리의 메모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복원은 원형에 가깝게 만드는 걸 전제로 진행했다. 1·2층 거실은 재현의 공간으로 나머지는 전시장으로 새 단장했다. 딜쿠샤 내부 모습을 찍은 사진 8장 중 1, 2층 거실 모습을 담은 것 6장을 기준으로 했다. 브루스가 메리의 유고를 모아 펴낸 책 『호박 목걸이』에 담긴 메모와 관련 기록도 요긴하게 쓰였다. 사진과 각종 문서 등 전시된 사료는 기증받은 것 중 일부다.

    가운데, 오른쪽 사진 혜화1117 제공


    ‘흑백이 컬러로, 평면이 입체로 되살아난’

    딜쿠샤의 심장, 거실

    2층 거실

    딜쿠샤의 하이라이트는 남아 있는 사진과 사료를 토대로 재현한 1·2층 거실 공간이다. 영국과 미국 등 각지에서 경매를 통해 최대한 비슷한 물건을 구매하고 구할 수 없는 건 국내 장인들에게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2층 거실에 전시된 자수 병풍과 주칠반이 대표적이다. 최 교수가 한창 설명하고 있는데 ‘댕~’하고 괘종소리가 울렸다.

    1층 거실

    교수님 잠시만요.

    방금 그 소리 저 시계에서 울린 거 맞죠?

    영국 옥스퍼드 근처 시골 마을에서 어렵게 찾았어요.

    한국으로 들여와 열심히 외관을 복원했더니,

    시계가 안 가는 거예요.

    이태원에서 평생 시계를 고치셨다는

    70대 전문가분께 도움을 청했어요.

    수평이 문제라고 진단하시고는 금방 손을 봐주셨어요.

    1층에 있는 난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을 구했는데 직접 가지고 가야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LA에 있는 운송 업체에 의뢰했더니 미국 내 운송에만 약 700만원이 넘게 든다고 했다. 부랴부랴 시카고의 업체를 알아보고 배송을 진행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세 차례나 운송 스케줄이 취소됐다. 우여곡절 끝에 시카고에서 배로 부산까지 실어온 뒤 다시 트럭으로 서울로 옮겼다.

    재현을 위해 구입하거나 제작한 살림살이들 [혜화1117 제공]

    전시된 물건 하나하나마다 쉽게 구한 것이 없다. 책 내용 중 3분의 2가 거실에 전시된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다. 물건을 확보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에 대한 이야기, 각 아이템이 지닌 문화·역사적 의미 등 앤티크 전문가만이 들려줄 수 있는 내용이 고루 담겼다.

    책 표지 사진 [혜화1117 제공]

    책을 꼭 한 번 읽고 가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 딜쿠샤에 가기 전에 한 번 그리고 다녀와서 한 번, 총 두 번을 읽었다. 아는 만큼 보였고, 의미를 알고 나니 현장에서 감흥도 두 배가 됐다. 처음엔 갸우뚱했던 구절도 현장을 보고 나서는 이해가 갔다.

    최지혜 교수는 “시간의 끈을 연결하는 것이 공간의 힘”이라고 했다. 100년의 시간은 허투루 쌓인 게 아니었다. 단순한 집이라고 하기엔 품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딜쿠샤. 개인의 것으로만 간직될뻔한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염원으로 딜쿠샤라는 현장에 박제돼 역사로 남았다.

    딜쿠샤는 공간 그 자체를 기억하는 박물관이다.

    피지배의 역사, 전쟁과 독재,

    개발지상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시간을 이겨낸 공간이자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대선배 격인,

    진본성이라는 개념이 확장된 의의를 지닌 곳.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 중에서

    홍지연 여행+ 기자

    참고 자료=『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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