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행] 구례 천은사는 알고 있다…추사 김정희가 독설을 퍼부었던 명필의 현판을 걸어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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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NN이 지난해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33곳을 소개했다. 전국 900여 곳이나 되는 그 많은 절들 중에서, 게다가 어느 사찰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마는, 굳이 33곳만 소개한 이유는, 부처 경지에 이르는 33단계에 빗대 선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3곳 중 4곳이 전남 구례에 있다(구례는 복받은 곳이다).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 사성암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사찰은 아마도 화엄사일 것이다. 각황전과 석등, 사자 석탑, 불화 등 국보로 유명하다. 수련하는 스님들 절로 유명한 연곡사는 아름다운 승탑이 많고 원효, 도선, 진각, 의상 등 4인 고승이 수도했다는 사성암은 구례 사찰 4곳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천은사 일주문. 주위 소나무 숲이 절경이다.

    그리고 천은사가 있다. 지리산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사찰 입구 일주문 옆에 우거진 소나무 숲이 절경이다. 오늘 ‘이런 여행’에서는 이 절을 찾아가 본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 서역에서 온 인도 승려가 창건한 것으로 소개돼 있다.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절 근처에 달고 깨끗한 샘이 있었다고 한다. 절은 몇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치다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했다. 그러다 숙종 5년(1679) 조유선사가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천은사(泉隱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천은사 제1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 관한 이야기다.

    절을 중건하면서 샘 근처에 살고 있던 커다란 구렁이를 죽이고 말았는데, 그때 샘도 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사찰에 크고 작은 화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은 구렁이가 불을 몰고 온다며 두려워했다. 이에 천은사 주지가 당시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게 찾아가 불길을 끊어줄 글씨를 부탁했다. 그는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기운이 나는 글씨체, 즉 수체로 ‘지리산 천은사’라고 쓴 현판을 건네주었다. 과연 원교가 쓴 현판을 거니 그다음부터 화재가 사라졌다고 한다.

    일주문 현판. 원교 이광사의 글씨.

    천은사에는 원교의 현판이 또 하나 걸려 있다. 천은사 주불전인 극락보전(極樂寶殿) 현판이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메인 법당을 말한다. 흔히 사찰의 중심 법당을 대웅전(大雄殿)으로 알고 있는데, 대웅전(혹은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경우에 한한다. 한국 사찰에서 가장 많은 주불전이 대웅전이라 이런 오해를 하기도 한다.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법당이 극락전(극락보전)이다. 참고로 불교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달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모든 이를 부처라 한다. 따라서 부처는 수없이 많은데, 그 가운데 으뜸이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다.

    잠깐 이야기가 옆 길로 샜는데, 다시 원교의 글씨로 돌아가자. 원교가 쓴 천은사 극락보전과 똑같은 글씨의 현판이 해남 대흥사에도 걸려 있다. 물론 원교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현판의 운명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멀쩡히 걸려 있다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창고에 처박히고 마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냐 하면 조선시대 최고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다. 추사는 중국 글씨체와 완전히 차별화한 독창적 서체 ‘추사체’를 완성한 조선 시대 대표적 서예가로 학자, 관료로도 출중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남다른 서체에 자부심이 컸던 그는 남의 글씨에 독설을 퍼붓기로도 유명했다.

    극락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 글씨다.

    추사는 안동 김씨와 대립했는데, 헌종 6년(1840) 안동 김씨가 집권하면서 비운의 삶을 살게 된다. 그 해 고초를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다 드른 곳이 해남 대흥사다. 그곳 주지가 초의선사였는데,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다산 정약용, 추사 등 당대 지식인들과 사이가 좋았다. 귀양가는 길이라 심사가 더 불편했는지 모르겠다만, 추사는 대흥사에 걸린 한 현판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어째서 저런 글씨를 걸어 놓았나. 내 다시 써줄 테니, 저따위 현판은 당장 떼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원교가 쓴 현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도 추사는 원교 글씨에 대해 악평을 하곤 했다. 원교는 서예 이론서 ‘서결’이란 책을 남겼는데, 추사는 이 책을 보고 “붓 잡는 법, 먹 가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서체를 망가뜨린 장본인”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자신보다 한참 윗세대(추사는 원교 사후에 태어난 인물이다) 서예 대가에 대한 이런 독설은, 모르긴 몰라도 주위 사람들을 무척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거 같다. 추사는 원교 글씨와 비슷한 글씨에도 혹평을 했다. 대표적 인물이 조선 후기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다.

    보제루. 현판은 창암 이삼만 글씨다.

    창암은 원교 글씨를 흠모해 그의 교본을 보고 글씨 연습을 했다고 한다.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서예에 빠져 집안을 어렵게 할 정도로 글쓰기에만 몰두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현시대에서는 스승인 원교 글씨보다 그 제자인 창암 글씨를 더 쳐준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원교는 성품이 모질지 못해 주의에서 글씨를 써달라고 하면 다 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TV쇼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현판 다수가 원교 작품일 정도다. 말하자면 너무 흔해서 가치가 높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창암은 현판을 많이 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희귀하다 보니 제자 글씨의 가치가 더 올라간 것이다.

    공교롭게도 천은사에는 창암의 글씨도 있다. 천은사 보제루(普濟樓) 현판 글씨가 창암의 작품이다. 낙관과 호는 없고 끄트머리에 ‘甲辰冬李三晩書(갑진년 겨울 이삼만이 쓰다)’라는 일곱 글자만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쓴 글씨다. 참고로 보제루는 건물처럼 보이나 천은사의 세 번째 문이다. 보통 절에 들어갈 때는 3개의 문을 지나가게 되는데, 천은사의 경우 제일 관문이 일주문, 제2 관문은 천왕문 그리고 마지막 3번째 문이 보제루다. 보제루를 지나면 바로 메인 법당인 극락보전에 이르게 된다. 화엄사와 마찬가지로 방문객들이 건물을 돌아가도록 하는 ‘우각진입’ 형태로 다가가게 된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보제루

    어쨌든, 추사가 제주 유배길에 전주에서 창암을 만났던 모양이다. 그 즈음 창암은 호남 제일의 명필로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많은 제자가 그를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추사가 면전에서 “이런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살겠네”라고 조롱에 가까운 혹평을 했다. 추사로서는 원교 글씨가 내내 못마땅했는데, 원교 글씨를 보고 익힌 창암의 글씨가 대단해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당시 창암은 70세로 추사보다 16살이나 더 많은 큰 어른이었으니 참으로 고약한 상황이었다. 추사가 명필 스승과 제자를 한꺼번에 욕보인 셈이다.

    나중에 추사는 원교와 창암에게 지독하게 말했던 것을 후회한다. 그는 8년간 제주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쓴 현판을 내리고 창고에 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게 했고, 전주에 도착해 사과하려고 창암의 집을 찾았으나 이미 죽은 뒤라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견디기 힘든 유배 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 송곳 같던 그의 심사평가 능력이 무디어졌던 것일까? 아니면 흐르는 세월이 그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 것일까? 추사에 혹평을 당한 스승과 제자의 글씨는 지금도 천은사에서 앞뒤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천은사 소나무 숲길. 힐링하기 딱 좋다.

    ※ 이 기사는 지리산생태탐방원 정정섭 자연환경해설사 해설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최용성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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