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최고 명문가에서 종갓집 고택 안에 카페차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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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대구에서 가장 핫한 카페는 250년 고택에 있다. 대구시청에서 출발해 차로 40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주말이고 주중이고 방문객이 이어진다. 달성군 현풍읍 못골(지동마을)에 위치한 한훤당고택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다양하다. 막 걸음마를 뗀 아이와 함께 온 아기엄마, 다과를 시켜놓고 SNS 업로드에 바쁜 젊은이들부터 여고동창생 그리고 차를 마시러온 어르신들도 많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한훤당고택은 이번 대구 여행 일정에 없었다. 500년 전 유학자의 흔적을 따라가다 달성군을 헤매다 결국 도착한 곳이 바로 고택 카페였다.

    대구? 여행할 게 뭐 있어?

    대한민국 대표 소비도시로 꼽히는 대구는 여행지 이미지가 약하다. 얕게 봐서 그렇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대구는 권역별로 주제별로 여행할 거리가 많은 동네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한훤당 김굉필’이다.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도동서원)과 김굉필의 직계 후손이 사는 고택(한훤당고택) 그리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이노정)를 둘러봤다. 초등학생들은 서원에서 옛것을 배우며 체험을 하고 한훤당고택 카페는 매일 손님으로 넘친다. ‘김굉필’을 따라 둘러본 대구는 옛것과 지금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대구의 정신유산,

    도동서원

    7월의 첫 시작을 ‘대프리카’에서 열었다. 지난 1일 대구 낮 기온은 30도를 웃돌았다. 하루 종일 뜨거운 볕을 받으며 돌아다닐 것을 대비해 속성으로 몸을 만들기(?)로 했다. 속 깊은 곳부터 찬 기운으로 무장하기 위해 대구 3대 냉면 중 하나인 대동면옥으로 향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평양식과 함흥식 물냉면을 같이 한다. 기왕 온 김에 이것저것 다 맛보자고 전 메뉴를 주문했다. 평양냉면, 비빔냉면, 수육과 갈비탕. 뜨겁고 차갑고 달콤하고 담백하고 쫄깃하고 탱글하고 온갖 맛과 식감으로 입안이 난리다. 대동면옥은 고기를 한번 숙성한 다음 육수를 내 잡냄새가 없고 깔끔하다. 아직 ‘대프리카’의 여름은 시작도 안 했다는데, 12시가 채 되지 않아 냉면집에는 벌써 대기줄이 늘어섰다.

    시내에 있는 냉면집을 빠져나와 도동서원으로 향했다. 부산한 점심시간 풍경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양옆이 산으로 막히고 낙동강이 흐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2019년 7월 유네스코는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1543년), 경남 함양 남계서원(1552년), 경북 경주 옥산서원(1572년), 경북 안동 도산서원(1574년), 전남 장성 필암서원(1590년), 대구 도동서원(1605년), 경북 안동 병산서원(1613년), 전북 정읍 무성서원(1615년), 충남 논산 돈암서원(1634년) 9곳이다. 대구 도동서원은 특히 ‘전형적 경사지 서원의 일렬 건축 배치’를 서원의 중요성으로 인정받았다. 도동서원은 대니산 서북쪽 끝자락에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에 들어앉았다.

    주차장에 내리자 어마어마한 은행나무가 시선을 빼앗는다. 처음엔 두 나무가 겹쳐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가보니 가지가 희한하게 휘어진 하나의 은행나무였다. 서원이나 향교에 가면 꼭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해서, 선현들도 배움이 있는 곳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어마어마한 노란 융단이 깔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영험해 보이는 은행나무에 신고식을 한 다음 도동서원이 배향하는 김굉필 선생께 제대로 인사를 올려야 한다. 서원 정문 수월루로 들기 전 왼편에 있는 신도비부터 찾았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1454년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어요.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으신 분이세요.

    1498년 무오사화 때 유배됐다가 1

    504년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2년 뒤 중종반정 후에 업적이 재평가 되면서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5현’으로 칭송받게 됐어요.”

    김정자 대구광역시 해설사

    김굉필 신도비

    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는 아무나 세울 수 없다. 보통 임금이나 종2품 이상 신하들의 무덤 앞 혹은 근처 길목에 세운다. 신도비에서 800m 떨어진 곳에 김굉필 묘가 있다. 한자가 빼곡하게 적힌 김굉필 신도비는 쌍두 거북상이 조각된 자연석 아래 세워졌다. 김굉필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와 업적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이 혹 자신을 비판하더라도 절대 따지지마라.” “남의 악을 말하면 마치 피를 입에 머금어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기 입을 더럽힌다.”

    수월루 단청을 끼고 촬영한 환주문(왼쪽) 환주문에서 바라본 수월루(오른쪽)

    수월루에 올라 바라본 풍경. 취재진에게만 특별히 올라가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서원을 구경할 차례다. 돌계단을 올라 수월루를 통과한다. 수월루는 최근에 손을 본 건물이다. 불에 타 터만 남은 것을 1974년 다시 지었다. 그래서인지 단청이 짙은 것이 새 것 티가 난다. 2층에 오르면 멀리 거대한 은행나무 사이로 낙동강 물줄기까지 내려다보인다. 수월루를 경계로 시공간이 확 달라지는 느낌이다. 환주문을 끼고 있는 야트막한 담장 안 무채색 건물들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참, 이 담장도 보물이다. 전국 담장 중 최초로 1963년 보물(제350호)로 지정됐다.

    환주문

    환주문은 좁고 높이가 낮다. 169㎝로 웬만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통과해야 한다. 자연스레 겸손한 마음이 든다. 고개를 낮추자 자연스레 발아래로 시선이 가는데, 어여쁜 꽃봉오리 모양 돌이 보인다. 문 가운데를 고정시키는 정지석도 정성스럽다. “서원으로 들어가기 전 숨을 고르고 한 박자 멈춰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중정당

    환주문을 통과하고 정면에 보이는 것이 중정당이다. 기단이 높고 폭이 좁아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방금 초등학생 체험프로그램이 끝났는지 작은 책상마다 앙증맞은 의복이 올려져 있다. 중정당에는 ‘도동서원’이라고 적힌 편액이 두 개가 달려있다. 선조가 내린 사액 현판은 검은 바탕으로 안쪽에 걸려있고 검은 글씨로 적힌 건 퇴계 이황의 글씨를 각자해 새겼다.

    도동서원은 1568년 현풍 비슬산 기슭에 최초로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됐다. 지금 자리로 옮겨온 건 1605년의 일. 당시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뀌었다가 1607년 선조로부터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도동서원은 건축미가 아름다운 곳이다. 서까래와 기둥 등 나무는 금강송으로 배에 싣고 낙동강을 통해 실어왔다. 중정당 기단은 마치 퍼즐처럼 각각 다른 돌을 쌓아 올렸다. 모양이 전부 제각각인 것은 이 돌들이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짊어지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을 추모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단을 올렸다. 각양각색 돌들이 마치 색바랜 조각보처럼 정겹다.

    기단에는 용머리 네 개가 있는데 이는 과거에 급제해 등용하라는 의미와 물을 상징해 목조 건물을 화재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 위쪽엔 흰색 띠를 둘렀다. 상지라고 하는데, 멀리서도 이곳이 성인을 모신 서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상지를 두른 곳은 전국에서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중정당 뒤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위치한다.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보통 때는 문을 잠가둔다. 동쪽과 서쪽 벽에 ‘강심월일주’ ‘설로장송’ 벽화가 눈에 띈다. 홰벽에 그려진 벽화는 군자의 절개를 표현했는데, 누가 그린 건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사당에서부터 온 길을 되짚어 나간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느리다. 한 곳 한 곳 문을 통과할 때마다 돌아온 길을 되돌아본다. 중정당과 내삼문 그리고 사당 등 서원을 구성하는 주요한 건물들이 일직선으로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배열돼 있다. 더 신기한 건 깊이감이다. 가장 안쪽에 있는 사당으로 점차 지대가 높아져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몰입이 된다. 도동서원이 우리나라 서원 건축 중 가장 전형적이고 완성도 있는 서원으로 꼽히는 이유다.

    창과 문을 통해 지나온 풍경이 네모반듯하게 액자처럼 담기는 것이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어여뻐서 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사진으로 잔뜩 남겨본다. 문틀 안으로 원하는 풍경이 들어오도록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고 수평을 맞춰 좌우 여백을 반듯하게 한다. 위로 지붕 단청을 걸고 찍는 것도 좋겠다. 하나의 건물이 아닌 서원 공간 전체에서 기하학적 미가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이다. 담장과 지붕의 가로선, 건물과 문 모서리와 기둥의 세로선이 건물을 둘러싼 공간마저 네모 반듯하게 재단하는 느낌이다.


    그 시절 대학자들이

    풍류 즐기던 곳,

    이노정

    도동서원의 멋에 흠뻑 빠져 원래 없던 ‘이노정’을 급히 일정에 넣었다. 이노정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로 한훤당 김굉필과 정여창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자그마한 정자다. 이노정은 현재 김굉필 선생의 후손들이 관리를 하고 있다. 급히 한훤당 선생의 20대 직계손 김백용씨에게 연락을 했다. 김백용씨를 포함한 한훤당 선생의 후손들은 이노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지동마을(못골)에 한훤당고택을 중심으로 모여살고 있다.

    제가 꼽는 대구 최고의 일몰 포인트입니다.

    대구 여행에 동행한 이주미 대구관광재단 차장이 이노정에 들어가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높은 언덕 쪽에 위치한 이노정. 그옛날 김굉필 선생과 정여창 선생이 이곳에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시절엔 이노정 코앞까지 낙동강이 흘렀단다. 지금은 강둑을 따라 자전거길이 나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몇몇 보인다.

    평소 이노정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관람객이 있을 때 관리인 혹은 김백용씨가 직접 와서 문을 열어준다. 항시 개방을 하면 이곳에 몰래 들어와 술을 먹고 추태를 부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김굉필 할아버지와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는 석채례가 격년마다 이곳에서 열립니다.

    저희 김굉필 할아버지 후손과

    정여창 선생님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모여 함께 제를 올려요.

    500년 전의 인연을 그 후손들이 이어온다는 것이 왠지 멋지게 들렸다. 이노정은 규모가 작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굉필과 정여창이 무오사화 때 유배된 1495년부터 1498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의 모습은 1885년 다시 지어진 모습이다. 건물을 마주하고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좌우 대칭이 뚜렷하다. 이곳에서 우정을 나누었을 두노인(二老)의 모습이 소담한 건물에 겹쳐보인다.

    건물 뒤쪽 그늘 안에서 김백용 종손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아예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며느리가 집 안에 작게 카페를 하고 있어요. 멀리서들 왔는데 시원한 거 먹고가.”

    종가집 안에 카페가 있다고? 여태껏 가본 종가집들은 엄숙 그 자체였다. 문을 굳게 잠그고 ‘실제 사람이 거주중입니다’ 팻말을 내걸었다. 담 옆을 지나는 여행객에 늘 정숙을 요구했는데, 김백용 종손은 대체 어떤 연유로 종가집에 카페를 열게 됐을까.


    종가집 대문

    열어젖혔더니

    사람들이 몰려드네,

    한훤당고택

    한훤당고택이 지금 자리로 온 건 1779년 일이다. 김굉필의 11세손이 현풍읍 지리에 이주하면서 한훤당고택을 중심으로 서흥 김씨 집성촌이 형성됐다.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길 옆으로 은행나무 보호수가 보인다. 나무 주변에 꽤 넓은 공터가 있는데 주차장으로 사용된다. 솟을대문은 권위의 상징이다. 높고 웅장하다. 가마를 타고도 출입할 수 있어야하고 말이 끄는 마차도 드나들어야 하기 때문에 높게 지었다. 한훤당고택의 규모는 1010평. 김백용씨가 어릴적엔 보통 3~4대, 30식구가 살았다.

    솟을대문을 지나 오른 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카페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한옥처럼 보인다. 카페를 연지는 이제 5년이 됐다고 했다. 행랑채와 카페 사이 야외 공간에 잔디를 깔고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했다. 카페엔 자리가 없어 김백용씨의 서재로 안내 받았다.

    김백용씨는 한훤당의 20대 종손이다.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34년동안 재직하다 2004년 퇴직을 한 그는 이듬해 종택에서 인문학 강의를 열기 시작했다. 이때 손님들께 차를 내주던 것이 카페의 시작이다. 현재 카페 운영은 며느리가 맡고 있다.

    한훤당고택 사당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캡쳐]

    집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 그 밑에 안채가 있어요.

    우리가 있는 이곳이 서재.

    서재 앞에 중사랑이 있었는데 복원을 안했습니다.

    한국전쟁 전 지동마을은 70여 채 기와집이 꽉 차있는 고즈넉한 동네였다. 전쟁이 났을 때 김백용씨 나이가 6살. 가족들을 따라 청도로 피난을 갔다. 그때 봤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낙동강 양쪽 강변을 따라 핏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마을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한훤당고택은 북한군이 차지했다.

    한 달 정도 피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성한 곳이 없었다. 마을엔 시체가 즐비했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한 몇몇은 대구 도심으로 부산으로 뿔뿔히 흩어져 현재 13가구만 남았다.

    서재랑 마주보고 있는 공간.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캡쳐]

    “서재랑 마주보고 있는 곳은 예전에 할머니가 계시던 곳이었어요. 옛날에 저기에 방앗간이 있었거든요. 마을 사람들이 다 이곳에서 디딜방아를 이용해 곡식을 빻아갔습니다. 제청(제사 지내는 청사)도 있는데 1년에 16번 제사가 진행돼요.”

    서재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김백용씨는 스스로 “대화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한훤당, 찰 한(寒) 따스할 훤(暄) 자를 써요. 옛날에 짚을 엮어서 만든 ‘도롱이’라는 게 있었어요. 우비입니다. 이 도롱이를 입으면 비를 맞아도 겉은 차지만 속은 따스합니다. 나에겐 차갑고 냉정하게, 즉 자신은 항상 경계하고 남에겐 따스하고 늘 겸손해라. 이런 의미가 담겨있죠.”

    한훤당 김굉필 20대손 김백용씨

    마지막으로 250년 된 종가의 대문을 열어젖힌 이유를 묻자 그는 “사람의 온기가 집을 지켜준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선한 기본 인성을 갖추고 살면 좀 더 발전적인 사회로 나아가지 않을까요.”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제101회 ‘마음이 넉넉하다 – 대구 달성군’편에서

    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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